“커, 흑……”
복부에 묵직한 발길질이 꽂힌다. 나이프를 피하는 데 급급해 바로 이어지는 공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내장을 뒤흔드는 듯한 충격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졌지만 멈추어 있을 새는 없었다. 크로우는 바닥을 굴러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빠르게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조커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말해 힘도, 속도도 크로우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 낸 신과 같은 존재와 대적했다고 했던가. 짧은 설명만으로도 어지간한 사태였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압도적인 상대와 싸워서도 이겼으니 이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 경험이 쌓인 것도 당연지사였다. 말없이 나이프를 겨누는 조커를 경계하며 크로우는 이를 악물었다.
조커의 어깨 너머로 어렴풋이 섀도가 보였다. 조커를 세뇌시킨 것은 저 자식이다. 크로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조커가 섀도를 감싸듯이 자세를 바꾸었다. 크로우는 작게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빈틈이 없어서야 아이템을 써서 상태 이상에서 회복시키기도, 섀도만 따로 공격하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크로우가 더욱 공격받게 되겠지. 메기도라온이나 레바테인을 사용한다면 섀도를 없앨 수는 있겠지만, 조커 역시도 제법 타격을 받을 것이다. 가뜩이나 다른 조력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니 쓸데없는 소모는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했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시간이 지나며 섀도의 영향력이 사그라들어 저절로 세뇌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크로우는 사벨을 고쳐 쥐었다.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래. 한번 싸워 보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커가 크게 도약했다. 크로우를 향해 공중제비를 돌자 코트 자락이 펄럭거리며 시야를 방해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크로우는 사벨을 들어 올렸다. 챙 큰 소리와 함께 조커의 나이프가 사벨 자루와 맞부딪혔다. 모든 무게를 실은 공격에 손이 얼얼해졌다. 중력까지 이용하는 공격을 정면으로 맞부딪히려 들다가는 승산이 없다. 크로우는 손목을 비틀며 몸을 돌려 조커의 힘을 흘려보냈다.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해 옆구리를 걷어차려 들었지만 발끝에 차인 것은 코트뿐이었다.
“칫……”
크로우는 황급히 균형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고 판단하자마자 회피로 이을 줄이야.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할 움직임도 인지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써먹는 현란한 몸놀림이었다. 다양한 상황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이니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손을 잡은 거래 상대로서는 든든하다고 해야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열만 받게 할 뿐이다. 크로우는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조커를 찾았다. 시야에 검은 것이 잡히자마자 돌려차기가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윽……”
어찌저찌 양팔로 막기는 했으나 몸이 3미터는 거뜬히 밀려났다. 당연히 팔도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신경을 잘못 건드렸는지 손끝까지 파르르 떨려왔다. 이대로라면 무기를 잡는 것도 버겁다.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이벌, 이라고.
우습지도 않다. 서로 동등해야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고 나면 오히려 챔피언과 챌린저에 가깝겠다. 그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던 상대인 아케치 고로는 이미 그때 죽어 버렸다. 괴도단의 리더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탐정 왕자는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잔재에 불과했다.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전부 불살랐다고 생각했는데, 불운하게도 잿더미 속에 미처 타지 못한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크로우는 자세를 바꾸며 사벨을 오른손으로 바꿔 쥐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조커에게 달려든다. 사벨을 내리긋는 시늉을 하고, 그가 회피했을 때를 노려 숨겨 두었던 왼손을 내지른다. 가면 쓴 얼굴에 쥘부채가 철썩, 소리를 내며 정확하게 꽂혔다. 조커의 눈에 간신히 이지가 되돌아왔다. 크로우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 쓸데없이 싸울 때가 아니잖아.”
그렇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었다. 조커가 머쓱한 듯 짧게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