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정식동거 첫 밤.
방은 며칠 내내 그랬듯이 변함없이 고요했다. 아케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굳게 닫힌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바깥, 얇은 벽 너머로 고작해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타인이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따끔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상상을 한다.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인기척을 조금도 죽이지 않고 다가온 누군가가 이불을 들춘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반응했었더라. 고작해야 몇 년 전 일임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웃었던가 아니면 용서를 빌었나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까. 아케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상상이었다. 문은 잠겨 있다. 아무도 아케치의 허락 없이는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집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다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인기척이 났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아케치는 눈을 번쩍 떴다. 침입자다. 쿵, 심장이 크게 뛰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케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문 옆 벽에 붙어 섰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런 곳에 들어온 거지 몸을 낮춘 채 문을 노려보던 아케치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침입자 따위는 없다. 있을 리가 없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의 범인은 어제부로 동거 상대가 된 아마미야 렌이다. 어느새 잠에 들었는지 벌써 아침이 되어 그가 거실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아케치는 쓰러지듯 침대에 다시 누웠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탓인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바보 같기는. 병원에 있을 때는 수 시간 간격으로 간호사가 오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대체 무엇에 신경이 곤두섰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집에 쳐들어오는 불청객 따위 이제 있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풀어진 긴장을 바로잡듯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케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입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뒤에야 났다.
“……왜.”
방이 건조했는지 목소리가 잠겨 걸걸했다. 아케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목을 문질렀다. 잠깐 사이를 두고 문밖에서 아마미야가 물었다.
“커피 마실래 인스턴트지만.”
어째서 대뜸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아마미야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케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새삼스레 아침부터 얼굴을 보고 같이 커피를 마실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친밀감을 위장할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어쩌다 보니 필요가 일치해 같은 공간에 거주하게 되었을 뿐인데.
“……그래.”
그러나 거절하기도 피곤했다. 밀어낼 이유를 생각해 낼 여력조차 부족해 아케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제 고작 짐 몇 개를 옮겼을 뿐인데 팔다리에 나른한 둔통이 느껴졌다. 긴 재활 치료 끝에 퇴원하고서도 아케치는 여전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나약하다는 것만큼은 지긋지긋했다.
거실에는 희미하게 커피 향이 감돌았다. 식탁 앞까지 다가간 아케치에게 아마미야가 물었다.
“나가게”
아케치는 아마미야를 마주 보았다. 머리카락은 정리라고는 되지 않아 부스스하고, 안경알은 한 번 닦지도 않은 듯이 흐릿했다. 목이 다 늘어난 나그랑 티셔츠에는 언제 착색되었는지 모를 얼룩이 군데군데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몸단장을 전부 끝내고서야 나온 아케치와는 대비되는 차림새였다. 아케치가 대답하기도 전에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언제 들어오는데”
아케치는 식탁 위를 쳐다보았다. 백엔 숍에서나 팔 것처럼 유치한 무늬가 인쇄된 머그컵에 다갈색 액체가 담겨 있고, 그 옆 작은 접시에는 희고 노란 덩어리가 얹혀 있었다. 카페오레와 에그 샐러드다. 아케치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쓰름한 액체가 입안을 텁텁하게 적셨다.
“내가 알려줄 의무는 없잖아.”
진실을 말하자면, 그저 잠옷 바람으로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허술한 모습을 보여줄 사이는 아니니까. 그러나 굳이 그와 함께 집에 붙어 있을 이유 따위는 없으니, 나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마미야가 앞머리를 몇 번인가 만지작거리더니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저녁. 안 먹고 오는 거면 같이 먹자고.”
“왜”
정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제는 그렇다 쳐도, 그와 아케치가 함께 식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동거를 이유로 쓸데없는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러잖아도 텁텁했던 입이 바짝 마르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아케치는 컵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아마미야가 대답했다.
“그냥.”
이상한 표정이었다. 설마 웃으려고 한 건 아니겠지.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아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케치는 괜히 포크를 들어 에그 샐러드를 쿡쿡 찔렀다. 아마미야가 턱짓했다.
“그거, 같이 먹어. 빈속에 커피만 마시면 안 좋대.”
“…….”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그는 늘 이랬던가. 의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뚱한 표정으로 예상치도 못한 말을 불쑥 던지는 탓에, 언제나 생경한 기분을 맛보고는 했던 기억이 났다. 특이한 녀석. 아케치는 대꾸하는 대신 포크 끝으로 에그 샐러드를 약간 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어디서 먹어본 것만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썩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저녁까지는 돌아올 거야. 아마.”
모든 것이 불편했다. 아케치는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평일 낮임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도쿄야 늘 이렇다. 언제, 어딜 가더라도 모두가 무언가 하고 있고, 모두가 바쁘다. 아무런 목적 없이 튕겨 나온 존재라고는 아케치밖에 없는 듯했다. 문득 멀미가 날 듯했다.
목적, 그러니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있다.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모아 둔 돈이라면 얼마간 있지만, 언제까지고 저금만 까먹으며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집세와 관리비 따위를 분담하려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집에서 계속 살 생각이야
그거야말로 기막힌 헛소리다. 한때 미간에 총구를 들이밀기까지 했던 상대와 희희낙락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케치는 여전히 손아귀에서 느껴지던 총의 반동과 화약 냄새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죽인 그가 가짜였다고 해도, 아케치의 살의마저 거짓이 되지는 않았다.
아케치는 정말로 아마미야 렌을 죽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마미야는 정말이지 특이한 인간이다. 자신을 배신하고 심지어는 죽이려 든 존재에게, 고작해야 집세를 절반 분담해 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 거주하지 않겠느냐고 태평스레 물을 위인은 아마 그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느껴 마땅한 감정이라고는 배신감이나 혐오 정도가 일반적일 텐데도.
‘장갑은 맡아 둘게.’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직도 버리지 않았을까 아직도 재전이 있으리라고 헛된 기대를 하는 걸까 탐정과 괴도, 라이벌이라는 거짓말을 마치 진실인 듯 굳게 믿으면서
물러 터진 바보 자식.
너와 나는 한 번도 닮았던 적이 없는데.
아케치는 호흡이 흐트러지도록 빠른 속도로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 탓에 꽁꽁 언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주저앉고 싶지 않아 아케치는 종아리에 힘을 주었다. 목적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 탐정 왕자…… 맞죠”
얼마나 걸었을까. 낯선 목소리가 상념을 흩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눈에 보아도 긴장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표정을 지은 여성이 머뭇거리며 아케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일까. 제법 심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죄, 죄송해요. 갑자기…… 저, 아케치 씨, 맞죠”
떨리는 것치고는 제법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문득,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밀려들었다. 잘못 본 것이라고, 사람을 착각했다고.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탐정 왕자’는 그저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니까. 그런 청렴하고 정의로운 존재 따위가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케치의 반응을 오해라도 한 듯 여성이 황급하게 양팔을 내저었다.
“아, 아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니, 그게, 죄송해요……. 그, 저기, 아케치 씨, 팬이라서 TV 안 나오게 돼서, 걱정했어요. 막, 다들, 안 좋은 소리도 들리고,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어, 죄송해요. 그게, 아케치 군, 아니, 아케치 씨 보고, 안심해서 저도 모르게……. 헉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그냥, 저, 늘 응원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지리멸렬한 문장을 한바탕 쏟아낸 여성이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고개를 꾸벅거리며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어찌나 쏜살같이 사라지는지 아케치는 그저 작아지는 뒷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잘됐네.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잖아 인정받고 싶었잖아 특별해지고 싶었잖아 그래서 즐겁지도 않은데 방긋방긋 웃으면서 믿지도 않는 정의를 나불댔던 것 아니야 방송에 나가지 않게 된 후로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 여전히 널 기억하고 좋아해 주는 팬들이 있으니 성공한 삶이네. 네가 바라던 그대로니까, 더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야
또다시 위장이 배배 꼬이며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 죄다 커피 탓이다. 빈속에 마셔 버려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다.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죄다 게워 내고 싶어 아케치는 크게 헐떡거렸다. 배를 찢어 내장까지도 전부 내다 버릴 수 있다면 조금쯤은 후련해질 수 있을까.
장갑 속에 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체온은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케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거리였다. 하기야, 낯설지 않은 장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던가.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익숙한 흉내를 내며 다른 이들을 따라 했을 뿐이니 이제 와 새삼스러울 일은 없었다.
아케치 고로는 언제나 미아였다.
벨이 울렸다. 아케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언제 와’
‘올 때 케첩 좀 사줘.’
‘까먹고 안 샀어.’
아마미야의 메시지였다.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듯, 태평스러운 내용에 문득 화가 치밀었다. 멍청한 소리 마. 내가 왜 네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왜 같이 저녁 따윌 먹어야 하는데 왜 내가 너와, 왜. 살아야 하는 건데
‘그냥.’
아침에 보았던 아마미야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이상한 표정. 아케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도 그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했다.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 따위는 없다. 모든 사건에는 동기가 있고,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다. 그 모든 일을 ‘그냥’이라는 한 마디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없는데도.
아케치는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눈앞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문을 열자 기계적인 벨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꾸며낸 듯한 밝은 인사가 들려왔다. 케첩이 어디 있지. 아케치는 냉장 진열대를 한참 동안 살폈다. 유음료, 컵 커피, 푸딩, 샌드위치, 팩 샐러드……. 아무리 찾아도 케첩은 없었다. 편의점 내부를 전부 둘러본 후에야 케첩이 그냥 선반에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아케치는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계산대로 향했다. 물건을 사는 간단한 행위를 하는 것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부족해, 마치 형편없는 촌극이라도 연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자신은 이 연극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현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진 문이 긴 복도를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볼 때면, 문 너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일상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은 죄다 방송용 세트장처럼, 가짜로 만들어진 모형이 아닐까. 살아 있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아케치는 언젠가 그런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 타인을 기다리며 따뜻한 요리를 만든다거나, 정답게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창작물 속에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시절이다. 그때는 모두가 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그저 운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당시 아케치는 몰랐다.
아케치는 케첩이 든 봉지를 고쳐 잡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흰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후에야 문고리를 돌릴 마음이 들었다. 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열렸다.
“어서 와.”
“오, 딱 적당한 때 오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뭔지 모를 음식 냄새가 풍겼다. 아마미야와 모르가나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제각기 인사를 건넸다. 순간 무언가 얹히기라도 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케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식탁 위에 케첩을 올려 놓았다.
“이거면 돼”
“아, 고마워.”
가벼운 어조로 감사를 표한 아마미야가 케첩 포장을 뜯었다. 다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사 인사를 해 댄다. ‘감사합니다. 살아나 주셔서.’ ‘늘 응원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아케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 미처 죽지 못한 이후로 세상은 불가해로 이루어진 모형 정원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아직 좀 더 걸리니까 씻고 와. 물 받아 놨어.”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고 나서도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케치는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린 후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때마침 아마미야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샛노란 오믈렛을 얹은 치킨 라이스, 소스를 듬뿍 뿌린 함박스테이크, 큼지막한 새우튀김과 칼집을 내서 구운 프랑크소시지, 브로콜리 양배추샐러드가 커다란 접시 위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맑은 미소시루는 그저 구색만 갖추는 용도로, 아무리 보아도 영양 밸런스가 편중된 구성이었다. 심지어는 오믈렛 위에는 알록달록한 국기 모양 이쑤시개가 보란 듯이 꽂혀 있었다. 어린애나 희희낙락하며 먹을 법한 메뉴였다.
“뭐야, 이건”
“어린이 정식.”
아마미야가 냉큼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다소 우쭐대는 듯한 태도였다. 모르가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렌 녀석, 분명 추우니까 크림 스튜 만들겠다고 해 놓고 저거 보자마자 완전 홀려버렸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기는 넌 가끔 너무 충동적이야. 저번에도…….”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자 하니 백엔 숍에서 장식용 만국기를 발견한 아마미야가 모든 저녁 계획을 뒤엎어 버렸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재료도 깜빡 잊어 아케치에게 부탁하게 된 듯했다. 아케치는 어이가 없어졌다. 고작 장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런 걸 좋아해 애도 아니고.”
“해보고 싶어서.”
아마미야가 목덜미를 문지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앉은 아케치는 그제야 자신의 수저만 왼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면 아침에도 포크가 그릇 왼편에 있었던가. 이렇게 그와 마주 본 상태로 비교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일부러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게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아케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국기 장식을 뽑았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뭐, 어쨌든. 잘 먹을게.”
아마, 이런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겠지. 촌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맛, 괜찮아”
아마미야는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는 듯했다. 분명 이전에 카레 정도밖에는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케치가 혼수상태로 보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눌어붙은 부분 하나 없이 샛노란 오믈렛은 겉은 폭신폭신하고 속은 녹진녹진한, 흠잡을 곳 없는 반숙 상태로, 케첩으로 간한 치킨라이스의 산미를 누그러트리고 고소한 맛을 더하는 역할을 했다. 양배추샐러드에 뿌려진 새콤한 유자 소스 역시도 가공육, 볶음밥, 튀김이라는 기름진 메뉴 구성을 절묘하게 보완했다. 내다 팔아도 될 수준,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상한 맛은 한참 웃돌았다.
“이 몸은 이 새우튀김이 좋아. 반죽은 엄청 바삭바삭한데 새우는 탱글탱글해.”
“그건 사온 거야. 함박스테이크도.”
근처 상점가 정육점에서 팔고 있어서 시험 삼아 사 봤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미야보다 며칠 먼저 이곳에서 머무르면서도 주변에 상점가가 있는 줄은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SNS며 온갖 커뮤니티를 돌며 인기 있는 가게라면 죄다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하기야, 필요 없는 것으로 치자면 지금 이 상황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 터다. 어째서 자신은 아마미야와 마주 본 채 식사하고 있을까. 그냥 거절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아케치는 반쯤 남은 음식을 쳐다보다가 수저를 내렸다. 더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양은 좀 많아.”
“그런가”
“오므라이스랑 샐러드만 있어도 충분하잖아.”
“그럼 어린이 정식이 아니니까.”
아마미야가 그렇게 말하며 제 몫의 치킨라이스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이제 보니 그는 아직도 국기 장식을 뽑지 않은 채, 가운데 부분만을 남기고 깎아내듯 밥을 먹고 있었다. 먹으면서 쓸데없이 유치한 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어린 애가 된 기분이기라도 한 건가.
“왜 그렇게 어린이 정식에 집착하는 건데”
아마미야는 한참을 우물거린 후에야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냥”
또 ‘그냥’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의문형이기까지. 대체 뭐냐고 묻고 싶다.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이야 아케치 고로의 본성을 모른다지만, 청렴하고 정의로운 ‘탐정 왕자’를 진짜라고 생각한다지만, 아마미야 렌은 다르지 않은가. 아케치가 여태껏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아케치의 표정이 굳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는지, 아마미야가 당혹한 듯 물었다.
“어린이 정식 싫어해”
“……아니. 딱히.”
싫은 건 네 태도야.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시선을 내렸다. 뭇 어린이들이 동경해 마땅했을 음식은 아케치의 손에 의해 아무렇게나 파헤쳐져 이제는 아무도 관심 주지 않을 모양새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입이 열렸을 때, 아케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먹어본 적 없었어. 한 번도.”
먹고 싶다는 희망조차 품어본 적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메뉴를 고르고 골라 한 접시에 담아낸, 그야말로 꿈만 같은 요리 아니겠는가. 누군가에게 꿈은 입에 담기만 해도 당연하게 현실이 되는 것이지만, 아케치에게는 정반대로, 마음에 품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케치는 기대하는 법보다도 전에 포기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편이 가장 쉬우니까.
기대를 걸지 않으면, 배반당할 일도 없지 않은가.
“나도 안 먹어봤어.”
아마미야는 그렇게 대답했다. 별달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그냥 해본 거야.”
역시 그는 자신과 전혀 달랐다. 조금도 같은 부분이라고는 없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도리어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케치는 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뭐, 맛은 나쁘지 않았어.”
아마미야가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케치의 감상을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에 이질감이 들었다.
“다음부턴 양 줄일게.”
“또 뭘 하려고”
“뭐든지.”
이상했다. 무언가 어긋나 있다. 분명 대화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미야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아침부터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다시금 아케치의 발목을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케치는 위화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랑 밥 먹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어쩌다 동거하게 됐다고 가족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마미야의 표정이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흐트러졌다. 모르가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렌은…….”
“아니, 괜찮아.”
아마미야가 손을 들어 모르가나를 막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그냥, 정말 그냥이야.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래.”
“그건 이유가 안 돼.”
“……그때, 마루키의 세계에서 벗어난 이후로, 생각을 좀 해 봤어. 내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너한테 뭘 원한 건지. 난…… 그냥 이런 걸 하고 싶었어. 아케치는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아마미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도 정도가 있지. 아케치는 아마미야의 말을 끊고 물었다.
“마루키가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