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핫밀크“아무래도…… 나오는 것 같단 말이지.”
뾰족한 귀를 양옆으로 납작하게 젖힌 모르가나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새파란 눈이 존재할 리 없는 무언가를 신경 쓰듯이 허공을 분주하게 두리번거렸다. 렌은 물었다.
“뭐가”
“뭐긴 뭐야 귀신 말이야 이 집, 사고 물건이라며”
숫제 하악질이라도 할 기세로 외친 모르가나가 부정을 털어내려는 듯 몸을 세차게 털었다. 덩달아 꼬리 끝까지 파르르 떨려 흡사 방울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보니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인지 세계며 대중의 나태에서 태어난 신 따위도 있는 마당에 귀신이 정말로 없을까 심지어 렌의 눈앞에서 꼬리 털을 부풀리고 있는 고양이는 사람과 말이 통하고, 이세계에서는 버스로 변신까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모르가나가 꼬리를 탁탁 내리쳤다.
“이 몸이 들었단 말이야 밤마다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새벽 두세 시경, 그러니까 흔히 귀문이 열리는 시각이라고들 하는 우시미츠시(丑三つ時)마다 기이하게 오한이 든다. 분명 푹 잠들어 있었을 터인데도,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춥다, 고 느끼는데도 발바닥이 축축해지도록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옆에서는 렌이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느릿하게 반복되는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차츰 고요해지려는 때에, 굳게 닫힌 방문 틈새로 낯선 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드르륵, 드륵, 덜걱, 덜커덕, 덜걱…….
마치, 무언가 찾고 있는 듯이.
모르가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렌, 네가 전에 그랬잖아. 전에 살던 사람들이 죄다 뭐가 나온다고 했다면서”
“그건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말 안 했어”
“어……. 치정이라던데.”
듣자 하니 사고 물건일 경우 세입자에게 미리 고지할 의무가 있다는 듯했다. 그러나 집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고를 축소하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렌이 집주인에게서 들은 내용은 몹시 단순했다. 이 집에서 사람이 죽은 적이 있다. 그 후로 뭐가 나온다며 세입자가 들어오는 족족 다시 나가 버린다. 치정 사건이 있었다는 말은 다른 부동산 중개업자에게서 들었다.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임신한 아내를 두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충격을 받아 유산하고, 정신이 나가 버린 나머지 잠든 남편을 식칼로 찔러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나. 그 후로 아내의 유령이 계속 나타난다느니 어쩐다느니, 쓸데없을 정도로 디테일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그 집은 별로’라고 깎아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귀신 이야기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그러나 사실 렌은 귀신보다도 ‘그래서 저렴해진 집세가 이 정도’라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다른 집들은 이 절반도 안 되는 평수인데도 집세가 그렇게까지 많이 차이 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이르면 그런 공포도 싹 사라져 버렸지만, 어쨌거나.
“영 뒷맛이 찝찝한 이야기인데…….”
모르가나가 투덜거렸다. 그 부분은 렌도 동감하는 바였다. 이게 단순한 괴담이라면 ‘원래 괴담이 다 그렇지’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귀신이 나타나느니 어쩌느니 하는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불합리하다고 해야 할까. 당사자가 전부 죽어 버린 이상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알 수도 없는데, 자극적인 부분만 남긴 불쾌한 소문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단 소리는 역시 귀신인 거 아냐 그 얘기가 진짜라면 말이지만. 그 왜, 렌 너도 어제 그랬잖아. 요리 도구 위치가 뭔가 바뀐 거 같다며. 귀신이 식칼이라도 찾고 있다거나…….”
그건 그냥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려서 한 소리였는데. 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케치 아냐”
말하고 보니, 새벽마다 나타나 남편을 다시 죽이려 식칼을 찾는 여자 귀신과 새벽마다 거실에 나와 뭘 하는지 모를 아케치 고로 중 어느쪽이 더 무서운지 모르겠다. 일단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있음직한 일인 데다가, 렌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러나 모르가나는 전자 쪽에 더욱 마음이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걔가 새벽에 거실 뒤질 일이 뭐가 있는데”
“출출해서 야식.”
“아케치가 그럴 리가 있겠냐.”
모르가나가 미심쩍은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되는 대로 입에 담아는 보았지만, 렌이 생각해도 정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다시 만난 이래로 아케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여러모로 말도 안 되는 재회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그렇다. 때마침 렌이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상경해 있던 그날에, 아케치 역시도 병원에서 퇴원해서, 비슷한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기묘하지 않은가. 시간, 공간, 둘 중 하나가 아주 약간이라도 달랐더라면 이런 재회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겠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지망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린 후로, 소지로는 그렇게 물었다. 거취에 관한 질문이었다. 기숙사에 들어갈 건지, 자취할 건지. ‘아니면 우리집에서 머물러도 된다만. 아니, 르블랑 다락방 말고, 진짜 집 말이다.’ 무척 감사한 제안이었으나 렌은 거절했다. 욘겐자야에서 대학까지는 편도로 한 시간가량이 소요된다. 매일 왕복 두 시간을 통학에 쓰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힘들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다만, 집세와 생활비를 따지자면 그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으므로 실은 핑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후타바랑 같이 사는 건 좀.’
소지로는 렌을 가족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리고 렌도 소지로와 후타바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싶지만, 아무리 애정이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가족이 될 수 없었다.
‘렌, 넌 항상 다정해. 소지로랑 똑같이…….’
‘소지로는 『아버지』라서 그렇지만.’
‘렌 너는 『아버지』도 아닌데 왜 다정한 거야’
그렇게 묻던 후타바의 떨리는 목소리를, 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후타바가 어떤 답변을 기대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렌이 해왔던 행동과 말들에서, 무엇을 느꼈던 것인지를.
호의는 있었다. 애정, 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도 있었다. 후타바가 용기를 내기를 바랐고, 친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랐고, 덜 힘들어하기를 바랐다. 스스로 죽음을 바라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후타바가, 힘을 내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이 자기 일처럼 기뻤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우려고 들었다.
그런 행동을 후타바가 다른 시선으로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작고 미숙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서툰 후타바가, 고작해야 자신과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말했다가는 여태껏 쌓아왔던 관계가 전부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후타바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타바가 바라는 감정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후타바에게 가급적 상처를 남기지 않는 선에서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소중한 동료니까.’
필사적으로 쥐어짜 낸 말에 후타바는 시원스레 납득한 듯이 굴었지만, 어쩌면 렌을 배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도 저도 죄다 자의식 과잉이라면야 차라리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후타바와 한 집에 같이 살 수 있을 만큼 렌은 뻔뻔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후타바에게 더욱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거리를 두는 편이 옳았다. 아무리 그래도 소지로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한편 기숙사 역시도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공안 때문이다.
‘이쯤 했으면 미행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렌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안 쪽 입장은 다른 모양이었다. 지난여름 있었던 사건 이후로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어 대니, 이래서야 오히려 일을 치라고 등 떠미는 꼴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기숙사에 들어가면 당연히 불편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기숙사에는 모르가나를 데리고 들어가지도 못하니 자취방을 구해 혼자 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종합한 결론을 말하자 소지로는 가타부타할 것 없이 도쿄로 오라고 말했다. 미적대고 있는 새에 괜찮은 집은 다 나간다는 이유였다.
그 후에는, 순식간에 별별 일이 다 지나갔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소지로가 부모님에게 뭐라고 연락했는지 냅다 기차에 태워져 도쿄로 온 렌은, 며칠간 대학 근처, 그리고 대학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역 중에서 입지가 괜찮은 곳들을 골라 온갖 집을 다 구경했다. ‘온갖’이라고 표현은 해도 대부분은 모양도 크기도 비슷비슷한 원룸이었지만, 아무튼.
대학까지 거리나 애완동물을 허용하는지 정도만 보면 충분하다는 렌의 말은 소지로 입장에서는 뭘 모르는 어린애가 하는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역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마트나 병원, 파출소 등 필요한 시설은 어디에 있는지, 물은 잘 나오고 잘 내려가는지, 냉난방에는 문제가 없는지, 채광은 좋은지, 환기는 잘 되는지, 곰팡이는 없는지, 가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관리비는 어떻게 책정되는지 등등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끝도 없이 나왔다.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봐야 하느냐고 투덜대자, 소지로는 ‘적어도 일 년은 살아야 하는데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비교할 거리라도 있는 게 다행인 줄 알아라’라고도. 하지만 그 다락방에서도 일 년을 살았는데 다른 곳인들 못 살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렌은 꾹 참으며 부동산 순례에 동참했다.
그리고 아케치를 발견했다.
사실 발견했다는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그저 머리색이 눈에 띄어 시선이 쏠렸을 뿐, 렌은 그를 보면서도 단번에 아케치를 연상하지 못했다. 아케치는 그만큼 달라져 있었다.
어깨 아래로 늘어진,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허리띠를 바짝 졸라 여민 코트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헐렁했다. 뒷모습만 보고서는 언뜻 외국 여자 모델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다.
잠깐 눈길을 끈 게 전부인, 모르는 사람. 그러나 너무나도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보는 쪽이 더 불안해질 만큼. 그런데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렌은 그것이 몹시 싫었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가운데 홀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실은 그런 이유는 나중에야 뒤늦게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아무런 생각조차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이야말로 진실이다. 따라가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모르가나가 든 가방마저 소지로에게 던지듯 내맡기고, 렌은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뒤쫓아 걸었다. 쫓아가서 뭘 할 건데 그냥 낮부터 술이라도 마신 거겠지,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어 오히려 이렇게 쫓아가는 쪽이 이상한 스토커처럼 보이는 거 아니야 발을 멈출 이유만 수두룩하게 떠올랐는데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결과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렌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오토바이에 치였을 것이다. 신호를 확인하지도 않고 횡단보도로 뛰쳐나가려 들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자살행위, 일반적이라면 할 리가 없는 짓이다. 거기에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헛구역질까지 합쳐지니 만취한 사람이 주정을 부리는 중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취했어요”
질문을 입에 담은 순간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 냄새를 조금도 맡을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는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리한 얼굴이 익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그 후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쫓아가려 했던 순간부터 이미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기는 한데, 한층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렌의 정신머리가 조금이라도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면 아케치와 동거하겠다는 발상 따위를 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이 집부터가 그렇다. 아케치에게는 원래부터 이 집을 계약할 마음이 있었다는 듯이 굴었지만, 실상은 조금도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날 아케치를 만나지 않았다면 렌은 애완동물 동반 입주가 가능한, 대학 근처에 있는 6평짜리 낡은 원룸을 계약했을 것이다. 당연한 소리다. 밖에서는 공안한테 미행당하고 집안에서는 고양이와 대화하는 거동 수상자와 기꺼이 동거해 주는 사람 그보다는 차라리 도쿄 한복판에서 츠치노코를 발견하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겠다. 뭐, 실제로는 츠치노코가 아니라 아케치를 발견해 버렸지만.
금방 거짓말이 들통나리라고 생각했다. 아케치라면 당연히 논리의 허점을 꼬집으며 신랄하게 빈정거릴 것이라고. 이를테면, 팔짱을 척 낀 채로 턱을 약간 들어 렌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한다거나.
‘내가 그 제안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데 너 같은 다락방 쓰레기랑 같이 살아서 내게 무슨 이득이 생긴다고 생각해 애초에 너랑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역겨워. 한 번 협력했다고 해서 네게 친근감이라도 품을 거란 망상이라도 했어 죽지 그래’
……아무래도 피해망상이 좀 심했던 것 같기는 하다. 시골에서 일 년 내내 범죄자라고 수군대는 소리나 들으며 수험공부만 했더니 정신이 한없이 피폐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아케치가 수락하리라고 생각해 내뱉은 제안은 아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저 렌이 멋대로 불안해한 것뿐이라고 안심하고 싶어서.
그러나 아케치는 그런 기대를 배신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은 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퀭했고, 목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맥없이 흩어졌다.
분명 눈앞에 살아 있을 아케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렌은 예정보다 일찍 도쿄에서 자취를 시작하기로 했다.
“……배고프면 먹고 싶어질 수도 있지.”
뭔가 억지로 먹이지 않으면 먹는 모습을 도통 볼 수가 없으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렌은 구태여 반대되는 말을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먹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가나가 딱 잘라 부정했다.
“차라리 귀신한테 씌었다는 쪽이 더 가능성 있겠다.”
이전까지 렌이 알던 아케치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귀신이 질려서 도망가 버렸을 텐데. 지금 같은 상태라면 모르가나의 말에도 설득력이 생기는 탓에 렌은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좀 더 희망적인 예측을 해 주면 안 돼 너 인류 최후의 희망을 닥닥 긁어모아 만들어진 존재 같은 거 아니었어 귀신, 아케치, 귀신 들린 아케치. 어떻게 된 게 평화로운 선택지가 하나도 없다. 뭘 골라도 살인이 최소 한 번은 발생하지 않았는가.
하기야, 평화롭기를 바랐다면 이런 집에서 아케치랑 동거하면 안 됐다.
“한번 확인해 보지 뭐.”
“으……. 정말 괜찮겠어”
“아케치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귀신이면 모르가나가 어떻게든 해봐.”
“이 몸한테 그런 능력은 없거든”
“바케네코잖아.”
“그러니까 이 몸은 바케네코가 아니라 고양이 아니, 고양이도 아니야”
새벽 두 시 반을 넘긴 시각. 방 바깥에서는 정말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낮에 들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법한 소리임에도 캄캄한 밤중에 들으니 조금쯤은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졸리고 피곤해서 더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렌은 작게 하품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정말 괜찮겠느냐고 묻듯 모르가나가 파란 눈을 깜빡거리며 렌을 쳐다보았다. 렌은 말없이 고개만 슬쩍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렸다. 창밖에서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는 덕분에 거실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주방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집 밖에서 나는 소리였나 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하고 있었는지, 반동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렌은 크게 하품하며 어슬렁어슬렁 화장실로 향했다. 역시 귀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아케치도 이 새벽에 괜히 거실에 나와 있을 리가 없고. 졸리니까 얼른 잠이나 자야겠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목덜미가 따끔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 모르게 심장이 쿵, 쿵, 거칠게 뛰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렌은 마른침을 삼켰다. 거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공간이 도려내진 듯한 적막. 덩달아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숨이 흐트러진다. 닭살 돋은 피부 위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린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흉내를 내 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인영이 있었다.
“”
렌은 헛숨을 들이켰다. 귀신……이 아니라 아케치였다. 소파에 푹 눌러앉은 탓에 아까는 미처 못 보고 지나친 듯했다. 괜히 놀랐네. 아니, 놀랄 만한 상황이기는 한가 일단 귀신보다는 아케치가 사람을 더 많이 죽이기는 했는데. 렌은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물었다.
“……안 자고 뭐 해”
아케치는 미동조차 없었다. 역광 탓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와서 자는 건가 열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렌은 조심스레 아케치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옮기려 했을 때,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거야.”
그림자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며 렌을 지나치자 스산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이래서야 귀신보다도 더 귀신 같다. 렌은 고개를 돌려 시커먼 등에 대고 물었다.
“내일 뭐 먹을래”
그림자는 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 날에도 아케치는 새벽마다 거실에 나와 있었다. 렌이 부르면 자리를 피하듯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만, 부르지 않으면 소파에 몸을 푹 기대어 앉은 그대로 털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뭘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잠자리가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접이식 간이침대는 푹 잠들기 불편하다니까. 정작 렌은 음료 박스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은 엉성한 침대 위에서도 잘만 잤으므로 썩 와닿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듯했다.
수면장애. 불면증. 새벽에 깨어 있는 이유. 잠 못 자는 이유가 뭔가요 잘 자는 방법. 기타등등. 렌의 구글 검색 기록은 며칠 사이 잠과 관련한 키워드로 온통 도배되어 버렸다. 사실상 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열이 펄펄 오르는데도 간호 받기 싫다고 화내며 버둥거리는 인간을 대체 무슨 수로 돕겠는가. 하물며 잠은 대신 자 줄 수도 없다. 아케치를 안고 업어 잘 때까지 둥개둥개 자장가를 불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가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으니,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둘 수 있었다면, 애초에 같이 살자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렌은 아케치를 내버려둘 수가 없다.
렌은 구글 검색 결과를 무아지경으로 스크롤했다. 이제는 슬슬 검색어와 동떨어진 내용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지만, 타성에 젖은 엄지는 멈추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반복 운동했다. 글을 읽는다기보다는 그저 화면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것뿐이던 렌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머물렀다.
‘식사만 하면 잠이 온다 당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적신호’
홀린 듯이 제목을 눌렀다.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적당히 복사해 온 일러스트를 문장마다 삽입한, 자극적인 문구로 읽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 말미에는 병원을 홍보하는 포스트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렌이 바라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공복에 당분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췌장에서 인슐린이 과다하게 분비…… 일시적으로 저혈당 상태를 유발하여 졸음이……’
계시라도 얻은 기분으로, 렌은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왔다.
바야흐로 렌이 새벽 2시가 넘도록 잠들지 않고 버틴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또 새벽이 왔다.
졸려서 죽어 버릴 것만 같다. 눈이 자꾸만 감기려 들고, 입만 열면 하품이 나왔다. 푹신한 침대를 내버려두고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싶다. 눕기만 하면 잠들 수 있을 텐데. 아케치가 재워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렌 혼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보답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케치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아케치의 생존을, 삶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싶다.
왜냐하면 렌은 한 번도 아케치를 살리지 못했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면서’
사람을 죽였지, 많이.
그러나 그것을 과연 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렌은 그저 아케치가 일련의 폐인화 사건과 정신 폭주 사건의 진범이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축약된 순간 모든 진실은 생동감을 잃고, 그저 무미건조한 문자의 나열이 되어 버린다. ‘사람을 많이 죽였다’라는 문장으로는 무수한 삶도, 무수한 죽음도 표현하지 못한다.
다 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아마미야 렌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케치 고로를 죽였다는 사실뿐이다.
마루키와 싸우자고, 다시금 입밖에 내뱉었던 그 밤에.
그 아케치 고로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렌은 눈가를 문질러 하품의 잔재를 떨쳐내고는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거실 한구석에 아케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부러 무시하듯이 주방으로 걸어간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낸다. 백엔 숍에서 적당히 사 온 머그컵은 불과 몇 주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인쇄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지만, 그래도 본래 용도에는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 우유를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빌트인 전자레인지는 몇 년 전에 산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우유 데우기 모드를 사용하면 우유가 분리되어 버린다. 몇 번쯤 몽글몽글해진 우유와 마주치고 난 후에야 렌은 문제를 깨닫고 우유 데우기 모드를 봉인했다. 컵이 회전판 위에서 빙글빙글 돌도록 놔둔 채, 찬장에서 잡화꿀을 꺼낸다. 브랜디 같은 것을 넣기도 한다지만, 유감스럽게도 렌은 아직 술을 살 수 없는 나이다. 꿀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잠시 기다리면 전자레인지에서 삐 소리가 들린다. 아케치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꺼내 꿀을 두 스푼이 넘도록 듬뿍 짜 넣는다. 날이 추운 탓에 꿀이 굳어 있다. 잘 녹도록 조심조심 저은 후 맛을 본다.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질 정도로 달다. 이 정도면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렌은 컵을 들고 아케치에게 다가갔다.
“마셔.”
아케치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먹으라고 제안하면 매번 저런 표정을 짓고는 한다. 렌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컵을 얼굴 바로 앞까지 내밀었다. 뻔뻔스럽게 굴자. 자신은 라이언 하트다.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적도 있고, 한 번은 키치죠지의 가구점에서 주위 시선을 무시하며 반나절 가량을 소파에 앉아 보냈던 적도 있지 않은가. 그냥 밀어붙이면 대개는 어떻게든 되는 법이니, 이번에도 통할 것이다. 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다.
“……뭐 하자는 거야”
“야식. 얼른 안 마시면 다 식어.”
“…….”
인상을 한껏 찌푸린 아케치가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나 언짢은 티를 내면서도 아케치는 결국 컵을 받아 들었다. 렌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제 몫의 우유를 들이켰다. 전부 마시고 나니 도리어 갈증이 치밀며 속이 매슥거렸다. 아케치가 진저리를 치며 작게 투덜거렸다.
“……달아.”
아무래도 꿀을 너무 많이 넣은 모양이다. 하지만 혈당은 확실히 치솟지 않았을까. 이제 인슐린이 과다 분비되며 일시적으로 저혈당 상태가 되면 아케치도 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럼 자자.”
“뭐”
렌은 아케치의 손목을 붙잡았다. 뼈와 가죽밖에는 없어 딱딱한 팔을 꽉 붙들어 당기자 아케치가 휘청거리며 끌려왔다. 간이침대보다야 렌이 쓰는 침대 쪽이 더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지난여름에는 좁은 텐트 안에서 남자 셋과 고양이가 같이 잔 적도 있으니 이제 와 다른 사람과 한 침대를 쓰는 일이 꺼려질 리도 없었다. 렌은 아케치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잘 자.”
바로 곁에서 아케치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