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부서졌습니다.)“재주도 좋네.”
어느 가을밤, 집에 돌아온 아마미야 렌을 맞이한 것은 바깥 공기보다도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팔짱을 낀 아케치가 소파 한가운데 앉아 다리를 척 꼰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렌은 무심코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려다 헛손질했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지 않게 된 지도 이제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따금 이렇게 옛날 버릇이 튀어나와 버린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마를 긁적거리며 렌은 내심 한숨을 삼켰다.
왜 또 화가 났담…….
이유가 아예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언짢아질 수도 있다는 범위로, 과연 아케치가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케치 고로는 여러모로 규격 외 인간이니까. 지금은 대략 개과천선했다고는 해도 그는 한때 수많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죄자인 것이다…… 그런 범죄자와 천연덕스레 같이 사는 렌도 썩 일반적인 인간은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아무튼 ‘일반적인’ 시각에 비추어 보자면…… 뭐, 기분 상할 일이기는 했다. 우선은 오늘 날짜. 11월 11일. 흔히들 막대 과자가 어쩌느니 하며 괜히 선물을 나누는 바로 그날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렌의 상태. 길쭉한 종이 쇼핑백 세 개와 편의점 비닐봉지 한 개가 양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종이 쇼핑백은 각기 다양한 모양과 재질로, 탐정 왕자가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 받았다는 것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는 아마미야 렌과 아케치 고로의 관계. 뭐, 둘의 관계에는 한 마디로 쉽게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과거가 얽혀 있지만, 과거사를 모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렌과 아케치의 사이를 표현하기에는 연인이라는 이름표가 세상 모든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서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고 할 만한…… 때려치자. 그래, 렌은 아케치와 사귀는 사이다.
즉, 결론만 말하자면 렌은 지금 연인 앞에서 남들에게 받은 선물(그것도 꽤 고급스러운)을 자랑하는 모양새로 귀가했다는 뜻이다.
잠깐, 혹시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으로도 기분이 상할 일인가 렌은 자문했다. 어쩌면, 조금쯤은. 하지만 이 과자들은 어디까지나 감사 선물이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렌이 여기기에 내담자와 라포를 쌓기 위해서는 이런 날에 감사 인사로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을 필요도 있었다. 애초에 뭔가 유달리 부담스럽거나 특별한 감정이 담겼거나 상대의 상태를 악화시키리라는 판단이 들었다면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감사 선물을 버리고 올 수도 없으니 들고 오는 것 자체는 문제 될 만한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
게다가 ‘재주가 좋은’ 것으로 따지자면 아케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닐 것이다. 방송에 나오지 않게 된 지도 이제 제법 햇수가 지나 ‘탐정 왕자’를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음에도 아케치는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당연한 소리다.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그러잖아도 제법 큰 축에 들었던 키도 나이를 먹으며 더욱 커져 무슨 패션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다 보면 한 번쯤은 여성들에게 붙들리고, 때때로 연예 기획사 명함까지도 받는 수준이니 분명 오늘도 상당한 선물을 받았을…….
받았을…….
받아야 했을 텐데.
렌은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거실. 어제와 다를 바가 없다. 주방도, 반쯤 열린 아케치의 방도. 선물로 추정되는 물건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부러 숨겨 놓았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아케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면서 언짢은 흉내를 낼 정도로 경우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즉…….
“아케치는 선물…… 안 받았어”
“전부 거절했는데.”
렌은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양손이 공손하게 모였다. 손목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던 봉투들이 눈치 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굳이 묻겠는데 이유는…….”
“그걸 꼭 물어야 알아”
한쪽 입꼬리를 올린 아케치가 턱을 치켜올리며 반문했다. 아니, 뭐, 역시 그렇겠죠. 보통은 사귀는 상대가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서 이런 선물을 받고, 심지어 떨레떨레 들고 오는 짓거리는 안 하겠죠.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는데……. 렌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아케치의 앞에 겸허하게 무릎을 꿇었다. 잘 생각해 보니 라포가 아무리 중요해도 거절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안…….”
잘 익은 벼처럼 고개가 저절로 숙었다. 하지만 너 이런 거 질투하는 캐릭터 아니었잖아…… 라는 생각은 아무리 그래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다. 게다가 질투하지 않더라도 신의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느낄 수는 있는 법이다. 가뜩이나 ‘그 단어’에는 해묵은 트라우마가 있는 탓에 렌은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별로 상관없어, 그런 건. 너 인기 많은 거야 예전부터 알았고.”
전혀 상관없지 않은 목소리인데. 렌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도게자라도 할 기세로 허리를 굽혔다. 후, 큰 한숨 소리가 들려와 몸이 괜히 움츠러들었다.
“내놔.”
렌은 주섬주섬 손목에서 쇼핑백을 빼 아케치에게 바쳤다. 아케치가 다시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네가 받은 거 달래 내 거. 달라고.”
당연히 준비했겠지 그렇게 말하며 아케치는 한 손을 내밀었다. 불그스름한 눈동자에 한기가 돌아 시선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렌은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잖아 준비할 시간 같은 거 없었다고…… 애초에 너 단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평소엔 줘도 안 먹는 주제에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렌의 두뇌는 위기를 맞이하여 평소의 수십 배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평소의 수십 배쯤 빠른 속도로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만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 된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분노만 더욱 키울 뿐이다. 불 난 데 부채질, 수준이 아니라 아예 휘발유를 들이부어 버리는 자살행위다. 알면서도 입술이 자꾸만 씰룩거렸다. 어째서 인간은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부나방 같은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태초부터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겠지. 인간에게는 생명을 향한 갈망뿐만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 죽음으로 인도하려 드는 자기 파괴적 충동 역시도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다, 다리 사이에 있는 포키라도 괜찮으면.”
“……하.”
아케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하여 렌의 다리 사이에 있는 포키는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