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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ゆみは

    @zziiz_ / 日本語おkですがまだ小説は書けない...!! 勉強頑張ります!!(というわけで小説は韓国語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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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ゆみ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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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三国志の文章はwikiを参考しました。自然な流れのため入れたので、必ず読めなくても大丈夫です。

    2. 鄭成功の人物に合わせて一部は脚色されました。

    3. 文章が簡単です

    鄭弓+三国志パロ鄭明儼(鄭成功)と周瑜のことは日本語で表記します。引用は除外しました。





    【190년. 초평 원년. 손견이 동탁을 치고자 거병하다. 서에 살면서 손책이 주유와 만나 벗이 되다.
     192년. 손견이 죽자 손책이 강도현에 건너가 살았으나 추후 다시 곡아로 옮겨와 군사를 모으다.
     같은 해, 원술이 주유의 종부 주상을 단양태수로 임명하다. 주유가 이를 따라가다.
     194년. 흥평 원년. 손책이 원술을 따르다. 원술이 손책을 회의교위로 임명하다.
    같은 해, 손책이 원술의 명을 받아 육강을 치다. 그러나 원술이 약속한 여강태수를 주지 아니하고, 유훈으로 여강태수를 삼다. 손책, 독립을 결심하다.
     손책이 강동을 치러 가는 중에 편지로 주유를 부르다. 병사를 이끌고 주유가 손책을 맞이하다.】




    鄭成功が三国の時代に 태어나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보고 싶다 에서 시작된 이야기.

    周瑜は 194년 20세. 孫策の 편지를 받고 사병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어린 아이가 나타나 周瑜に 만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들음. 다른 어른이 있냐고 물었더니 어린애 한 명뿐이라 하고, 주변 병사들은 오히려 수상하다고 얘기하는데 周瑜は 그래도 일단 만나보기로 함.

    근데 데리고 오라고 해서 봤더니 저보다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온통 먼지투성이에 며칠은 굶은 것처럼 볼이 앙상함. 그런데 붉은 눈동자만 유달리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周瑜は 속으로 총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음. 공손하게 예를 표하는데 그것만 봐도 잘 배운 자식 같았음

    자기는 정가의 자식 明儼で、아버지는 상인 일을 하시다가 변고를 맞아 전부 돌아가시고 자기 혼자 남았다고 소개함. 나이는 열한 살. 갈곳 없어 떠도는 와중에 병사들을 보았고 자기를 데려가주면 훌륭한 병사가 되어 보답하겠다고 주장함.

    병사들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인데 周瑜が 이것저것 물어보니 글자도 잘 읽고 論語を 배우고(孔子는 한참 전에 있었을 텐데 論語가 그때 있었을까 어쨌든 굉장히 잘 배운 티가 났다고 마음의 눈으로 봐주세요) 무술도 익혔다고 함. 고작 열한 살인데 무술을 배워봤자 얼마나 배웠겠냐마는, 周瑜は明儼が 크게 될 상이라 여겨서 그를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함.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




    【195년. 흥평 2년. 손책이 우저의 유요 진영을 공격하여 양곡과 군수품을 얻고, 말릉성을 공격하다. 설례와 착융이 서로 협력하여 설례가 성을 지키고 착융은 남쪽에 주둔했다. 손책은 먼저 착융을 공격하여 무찔렀고, 착융은 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한데 설례가 갑자기 번능, 우미와 협력하여 성을 버리고 나와 우저를 습격하여 재점령했다. 손책은 번능을 공격하여 무리 1만 명을 사로잡고, 다시 착융을 공격하다가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이에 잠시 물러났는데, 어떤 자가 “손책이 죽었다.”고 하니 착융이 기뻐하며 부장 우자(于慈)로 하여금 추격하였다. 그러나 함정이었고 복병에게 기습을 당하여 1천 명이 죽었다. 손책은 착융에게 자신이 멀쩡히 살아 있음을 과시하였고, 착융은 두려워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손책은 착융의 주둔지가 견고하다고 여겨 내버려두고 해릉에서 유요의 별장을 격파하고, 호숙과 강승을 항복시켰다. 마침내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팽택에 주둔하다가 예장으로 옮겼다.】




    한창 孫策と周瑜が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이었음. 그 사이 1년이 흘러서 周瑜と孫策は 21세, 明儼は 12세가 됨. 周瑜と孫策は 함께 전술을 의논하거나 다쳤을 때 간호할 때가 많아서 明儼のことを 늘 봐주지 못했지만, 明儼は 훌륭한 장수가 되겠다고 다짐한 만큼 홀로 열심히 수련함. 말을 돌보는 허드렛일도 하고 심부름도 하러 열심히 뛰어다님. 그 즈음엔 다들 明儼を 기특하게 여기고 이것저것 가르쳐주었고, 孫策も周瑜が 눈여겨본 인재라고 해서 관심을 보임.

    그러던 어느날, 착융이 성에서 시위를 하고 있을 무렵 周瑜は 홀로 수련장에서 활을 당기고 있었다. 그걸 엿보던 明儼が、周瑜の呼びに 머쓱해하며 바깥으로 나옴. 요즘 무술은 잘 익히고 있는지, 어떤 무기가 제일 쓰기 편한지 알려주다가 周瑜は 여러 무기를 써보는 것도 좋다며 활시위를 당기는 법을 알려줌. 활 쏘는 법을 알려줄 때 아무래도 작은 애가 앞에 서면 뒤에서 감싸듯이 서서 활도 잡아주고 시위를 당기는 손도 잡아주고... 그러다 문득 明儼を 내려다봤는데 애기가 귀가 새빨간 거임... 周瑜は 아직까지는 애가 너무 어리고(그 나이때는 성인과 아이의 경계가 명확히 나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충 15~16세 정도는 되어야 어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함) 그래서 그냥 아직 어리구나^^ 하고 말았음. 화살은 과녁 정중앙은 못 맞췄지만 워낙 힘이 좋으니 활도 잘 쏨; 그래서 이것저것 더 알려주다가 孫策が 와서 周瑜は 자기가 쏘던 활을 明儼に 쥐어줌. 이걸로 연습하라고.

    孫策が周瑜と 함께 가면서 明儼が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더니 침대에도 부르려고 하고 놀림ww 뭐 동성애가 엄청 죄악시되던 문화도 아니었고 시동 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孫策は 정말 가벼운 농담조로 말했을 듯. 周瑜は 어깨만 으쓱해보일 것 같음


    같은 해, 孫策は 단양을 周瑜に 맡기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을 몰고 회계로 떠남. 周瑜の 옆에서 孫策に 인사하는 明儼を 보다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만날 땐 더 훌륭한 병사가 되어 있도록 해라 하고 격려해줌. 明儼の目は 완전 반짝반짝... 周瑜は 그냥 웃고 말았음. 귀여우니까.

    갑작스럽지만 여기서의 孫策は 약간 호전적이고 돌진하는 걸 서슴지 않는 성격으로, 한 번 불이 붙으면 남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함.周瑜については 자신의 등을 맡겨도 될 만큼 강하게 신뢰하고 있음. 明儼については周瑜が思うことと同じ、앞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다, 잘 자라서 제 몫을 하는 병사가 되어줄 것이다 하고 바라고 있을 듯.

    ...쓰다보니 孫策と周瑜の息子に 되어버린 기분이다...




    【손책은 주유에게 단양을 지키게 하고, 주치에게는 오군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회계를 공격했다. 이후 원술이 단양태수를 원윤(袁胤)으로 교체하고 주상과 주유를 수춘으로 불러들였으며, 주유를 장군으로 쓰려 했으나, 주유는 원술을 낮게 보고 나중에 동쪽으로 가고자 거소장(여강군 거소국의 현장)을 자청했다. 거소장 시절에 노숙(魯肅)에게 군자와 식량을 청했고, 노숙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곡을 흔쾌히 내어준 일을 계기로 노숙과 친교를 맺었다.
    회계태수 왕랑은 손책의 침략에 맞서 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맞서 싸워, 고릉에서 손책을 저지했다. 손책은 여러 차례 강을 건너 싸웠으나 이길 수 없었다. 숙부 손정이 왕랑을 직접 공격할 것이 아니라 요충지 사독을 먼저 점거하도록 진언하자, 손책은 이를 따라 왕랑을 속이고 사독 길로 나아가 고천둔을 습격했다. 왕랑은 크게 놀라 옛 단양태수 주흔 등을 파견했으나, 손책은 이를 무찌르고 주흔을 베었다. 왕랑은 패배하여 바다에서 표류하다 동야까지 이르렀는데, 손책은 동야까지 왕랑을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손책은 왕랑을 문책하여 쫓아내고, 회계를 평정했다.
    회계를 평정한 후 손책은 오군으로 왔다. 이미 주치는 오군태수 허공을 격파했으며, 허공은 오군의 호족 엄백호에게 의탁했다. 손책은 오정 사람 추타(騶他), 전동(錢銅), 가흥 사람이며 전(前) 합포태수 왕성(王晟) 등의 무리를 모두 격파했다. 아버지와 친교가 있던 왕성의 일족들을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주살했다. 그리고 엄백호를 공격했다. 엄백호는 아우 엄여에게 화의를 요청하게 했는데, 손책은 창으로 엄여를 죽였다. 이를 들은 엄백호는 두려워하여 허소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은 허소의 의로움을 존중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周瑜が 노숙과 친교를 맺고 거소장으로 지내고 있을 무렵, 周瑜は 무열황후 오씨에게 편지를 받는다. 周瑜は孫堅の 생전 무렵부터 孫策と 친하게 지냈고, 孫堅を 진심으로 섬겼기 때문에 당연히 오씨와도 친분이 있었고, 오씨부인도 周瑜のことを 아들처럼 여김. 그 편지엔 孫策が孫堅とも 친교가 있었던 왕성의 일족들을 모조리 주살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음. 말려도 듣지 않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탄식이 적힌 편지를 들고 周瑜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음. 어쩐지 지금의 잔인한 선택이 추후 孫策の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음.

    그때 그를 걱정하면서 明儼が 다가옴. 아직 어리지만 周瑜の 안색이 나쁘다며 걱정하고, 차를 내올지 물어옴.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보니까 묘하게 마음이 안정이 되는 기분이라, 周瑜は 웃으면서 고맙다고만 말함. 孫策は 멀리 있지만 옆에 明儼が 있다고 생각하니까, 周瑜は 그가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지가 되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음.

    물론 明儼は周瑜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함. 孫策と周瑜が 서로 좋아하는 줄 알고 혼자서 몰래 속앓이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周瑜は 거사를 앞두고... 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닌 것 같았음. 그래서 그런 점에서는 마음을 놓았지만 아무래도 나이차가 있으니까... 어른이 되면 반드시 고백해야지 하고 무술을 열심히 연마하는 중.




    【손책은 강동을 평정하고, 지방관을 모조리 바꾸어 자신을 회계태수, 주치를 오군태수, 오경을 단양태수,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또 예장군을 나누어 여릉군을 신설하고, 손보(孫輔)를 여릉태수로 삼았다.이후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손책은 원술을 꾸짖는 편지를 보내고 절교했다. 또한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袁胤)을 서곤을 파견해 쫓아냈다.
     건안 3년(198년), 손책이 원술과 조조의 교전 중 조조를 돕자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으로 임명하고 오후(吳侯)로 봉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기도위를 주고 오후로 삼았으며 회계태수를 겸하게 했다. 손책은 사신을 보내 방물을 진헌하되, 건안 원년(196년)에 올린 것의 배가 되도록 했다. 같은 해 거소장으로 있던 주유가 달아나 오로 넘어왔다. 손책은 주유를 환영하고 건위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주유는 여강군에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우저를 지키면서, 나중에는 춘곡장도 겸임했다.손책은 형주를 노리고, 주유를 중호군 겸 강하태수로 삼았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양주 북부의 환현을 공격했다. 이때 교공의 두 딸 가운데 언니 대교를 손책이 아내로 삼았고, 주유는 여동생 소교를 아내로 삼았다.】




    사실 이때 周瑜は 결혼했지만... 결혼한 게 맞지만 사이도 좋았을지는 모르겠고 이 글은 鄭弓のために 쓰고 있는 것이라 저를 용서해주세요 소교부인... 자식도 많았으니 분명 사이는 좋았겠지... 이때 周瑜は 24세, 鄭成功は 15세였음. 孫策が 토역장군이 될 무렵, 周瑜は 더 이상 원술의 밑에 있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오로 떠남.

    그렇게 오는 중에 원술의 병사들과 싸워서 전투가 일어났는데(픽션),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났음. 하지만 빨리 떠나지 않으면 잡힌다는 걸 아는 周瑜は 남은 병사들을 빠르게 추려서 떠나라고 명령함. 그런데 가장 늦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으니 明儼だった.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묻어주느라 늦어지고 있었던 거임. 周瑜は 좀 엄하게 시신은 그냥 두라고 혼냈는데 明儼は 자신의 동료들이 새들에게 파먹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눈물을 흘림.

    그때 周瑜は 문득 생각함... 요즘 세상에,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이 벌어지는 시대에 저렇게 정이 많아서 어찌할까. 이 아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함이라고 생각하면서 내심 안타깝게 여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용맹하고 어린 나이에도 용감히 싸워 적을 많이 무찔렀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임. 인간의 도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나약한 것도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함. 周瑜は 냉철하니까... 그러면서 孫策の 잔인한 처사를 떠올리고 씁쓸해함. 明儼が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孫策が 그런 부분을 잡아줄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함. 자신은 오히려 孫策に ‘너는 멀리 있어도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니까’ 하고 자신의 일부처럼 멀리 보내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럴 땐 간언하고 싶어도 간언할 수 없잖아.




    【건안 4년(199년) 원술이 죽자 여강태수 유훈이 원술의 잔당을 규합하고 유엽(劉曄)이 쳐 얻은 정보(鄭寶)의 세력까지 얻어 강력한 독립 세력을 형성하였다. 손책은 유훈을 꾀어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상료를 치도록 권했다. 식량이 부족한 유훈은 이 꾀임에 넘어갔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이때 황조(黃祖)를 토벌하러 가다, 유훈이 상료를 쳐 이기지 못했음을 듣고 빈 유훈의 거점 환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원술의 유족과 유훈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유훈은 팽택으로 회군하다 손분과 손보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 기수로 가서 황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황조는 아들 황역(黃射)에게 수군 5천을 파견하여 유훈을 구원하게 했으나, 손책은 황역의 원군이 오기 전에 유훈을 격파해 황역은 달아났다. 유훈은 조조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은 황조를 공격하였다. 유표의 조카 유호(劉虎)와 한희(韓晞)가 유표에게서 파견되어 황조의 선봉을 맡았는데, 손책은 이들을 무찔렀다.
     황조와 유훈을 격파하고 돌아오던 중 예장을 지나쳤다. 이미 양주자사 유요는 죽고 없으며, 예장태수 화흠(華歆)은 겨우 스스로 지키고 있을 뿐이고, 단양 사람 동지(僮芝)가 예장군의 일부를 점거하고 스스로 여릉태수를 칭하고 있었으며 파양 지방도 화흠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손책은 예장태수 화흠을 상객으로 대우하고, 종형 손분으로 예장태수를 삼고 손분의 아우 손보까지 딸려 예장을 위임했으며, 손분 형제가 예장을 평정하자 손보를 옛 동지가 가지고 있던 여릉태수로 삼았다. 한편 유요의 유족들을 거두었다. 유요의 맏아들 유기(劉基)는 오나라의 중신이 되어, 후에 대사농이 되었다.
    손책이 조조에게 대사마를 요구하였는데 조조가 거절하여, 두 세력의 사이는 냉소적으로 변하였다.】




    200년. 周瑜は 26세, 明儼は 17세. 그러고보니 중국의 이름은 언제 누가 지어주는 거지 태어날 때 지어주나 한국은 호를 성인식 때 어른들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쨌든 周瑜が 슬슬 明儼が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갈 무렵이었음. 그런데 알고는 있지만 말로는 묻지 않음. 일단 자신은 그가 아직 어린애로 보이고... 뭐랄까 기특하고 좋은 아이, 정도로 생각하지 사랑하는 상대로는 보이지 않는 상태.

    그 와중에 孫策が 부하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바람에 고대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이 발생함. 온갖 사람들이 말리고 무열황후 오씨도 말렸지만 너무 강경한 데다가 오히려 고대를 편드는 자들은 같이 죽이겠다고 함. 周瑜が 마지막까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간청했지만 孫策は 매정하게 뿌리침. 이번에야말로 孫策が 화를 면치 못하겠구나, 하고 周瑜は 무심코 생각함. 조조와의 사이도 틀어지고, 이렇게 계속 잔인한 행동을 반복해서야 적만 늘어갈 뿐이라고.

    周瑜は 그날 상심에 빠져 술을 취하도록 마심. 明儼が周瑜を 말렸지만 周瑜が 슬퍼서 그러는 걸 아니까 강경하게 하지도 못하고... 반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취해서 몸도 못 가눌 정도가 되자 그제야 明儼が周瑜を 안아들고 침실로 감.

    그런데 周瑜を 눕혀놓고 나가려는 순간에 갑자기 周瑜が明儼を 확 잡아끄는 거임; 날 좋아하지 하는데 明儼は 반박도 못하고 얼굴 빨개져서 어버버 하다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해야 함. 아무래도 나이차도 있고 여기서는 상사 니까 존대하는 세계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周瑜が 술도 취하고 가슴이 너무 허하고 그래서 明儼に 매달림... 나를 취해도 좋다고... 그런데 明儼は 여기서 이성줄 다잡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른 때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무척 기쁠 겁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슬플 때 안고 싶지 않습니다.」

    하는데 周瑜は 멍하게 올려다보기만 함. 아직 이쪽은 정신 못 차렸으니까...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데 明儼が周瑜を 바로 눕히면서

    「당신께 슬픈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요.」

    하는 거야... 周瑜は 아무 말도 못하고 明儼が 이끌어주는대로 머리 풀고 옷 갈아입고... 그냥 소중하게 눕혀짐... 明儼が 좋은 밤 되시라고 인사하고 나가는데 뒷모습 멍하니 보다가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잠들어버렸음 좋겠음. 키 는 이미 이쯤이면 周瑜の 키를 따라잡았으면 좋겠네요 周瑜の 키는 원래 182cm 정도라지만 여기서는 サーヴァントの 신장을 반영해버린다 내맘이야 어쨌든 明儼周瑜と 거의 같거나 조금 작은 정도일듯


    다음날 周瑜が 일어났는데 원래 周瑜は 술에 강해서 딱히 숙취는 없음... 그리고 明儼が 잘 주무셨냐고 와서 인사하고 차랑 물 내오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라, 빤히 보다가 周瑜が 차 마시고 옷 갈아입고 나가면서 明儼の 뺨에 입맞춰줬음 좋겠음. 고맙다고 말하면서 웃어주고... 明儼は 혼자 남아서 얼굴 새빨개진 채로 周瑜の 뒷모습 보고 있어야 함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許)를 기습, 헌제(獻帝)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헌제에게 가던 오군태수 허공의 사신을 붙잡았다. '손책은 항적과 비길만 한 효웅으로 마땅히 중히 여겨 조서를 내려서 경읍으로 불러와야 하는데, 만약 외진에 그대로 두면 두고두고 세상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갖고 가던 사신이 손책에게 잡힌 것인데 손책의 불같은 성격에 허공이 용서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손책은 허공을 거짓으로 청하여 만나고 무사를 시켜 허공을 교살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허공의 식객 허소(許昭)는 어느 날 손책이 홀로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했으나 손책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때 손책은 기습을 당한 탓에 중상을 당했고 생명이 위독했다. 뒤늦게 달려온 정보(程普)가 손책을 진중으로 데리고 가 치료하도록 조치를 취해서 손책은 일단 생명은 건졌다.】




    그리고 그 해, 孫策が 허공의 식객 허소에게 기습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남. 孫策は 허소를 살해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상처가 중해서 겨우 목숨만 건진 상태였음. 周瑜は 사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孫策の 곁에 밤낮으로 곁에 붙어 있으며 간호함. 그런데 상태는 나날이 나빠지고, 어느날은 孫策が 고대의 환상을 보고 周瑜が 고대로 착각해서 죽이려고 목을 조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孫策が 힘이 더 세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뭔가 불길함을 느낀 明儼が 급하게 뛰어들어와서 孫策を 밀어내고 周瑜を 구해냄. 그제야 孫策は 자신이 周瑜の 목을 졸랐다는 걸 알고 충격받아 실신하고 明儼は周瑜を 데리고 방을 빠져나감.

    孫策が 얼마나 힘주어 졸랐는지 목에는 손톱자국과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음. 周瑜が 냉정해지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할 수 있었는데 왜 그 방에 위험하게 들어왔느냐고 明儼を 혼냄. 아무래도 孫策は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明儼も 위험했고... 그런데 明儼が 손목 잡으면서 비명도 못 지르고 계셨으면서 무슨 말이냐고 처음으로 화냄... 明儼に 잡힌 손에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는 걸 그제야 깨달음. 맥이 탁 풀려서 그대로 쓰러지려는 周瑜を 안아서 자리에 앉힌 明儼が 제발 당신을 돌보라고, 이럴 때야말로 무너지면 안 된다고 호소함... 周瑜は 강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테지만 상대는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孫策だったから... 그래도 周瑜は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明儼を 보면서 겨우 정신을 다잡음. 그러면서 내가 생각보다 이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정말 아끼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음 좋겠음...




    【상처를 입은 손책이 손권을 불러 이르길,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는 것은 너가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너만 못하다."고 했다. 이후 밤이 되자 죽었고, 사망 당시 손책은 불과 26세였다.
    사망 경위에 대하여 삼국지 배송지주에서 인용된 《오력》에 따르면, 상처를 입어 요양 중인 손책이 거울을 가져다 비춰보고 좌우에 말하길 “내 얼굴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 했다. 책상을 치고 크게 분격하니, 상처가 모두 파열되어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 배송지주에서 인용된 《수신기》에 따르면, 손책이 우길(于吉)을 죽이고 난 이후 우길이 주변에 있는 듯이 바라보니 손책이 점차 평소의 모습을 잃게 되었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봤는데, 거울에 우길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손책은 거울을 깨뜨리고 고함을 질렀고 이후 상처가 모두 터져 얼마 안되어 죽었다고 한다.
    사후,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증되었다.】




    우길의 이야기는 고대의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썰에서는 생략함. 그래도 제정신이 든 孫策が孫権を 불러서 그에게 후임을 맡기고 다음에 明儼を 부름. 孫策は明儼も 거의 의형제처럼 소중한 존재고 훌륭한 장수로 여겼음 좋겠음... 周瑜が 너를 많이 아끼니 부디 끝까지 그를 보좌해달라고, 孫権にも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함. 明儼も孫策に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어서... 얘기를 듣고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 장군께 맹세하겠다고, 반드시 제 이름을 걸고 周瑜を 지키겠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날 밤 거울을 보고 헛것을 보고 발작하던 孫策は 온 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상처가 터져서 죽었음... 울지도 못하고 반쯤 텅빈 눈으로 孫策の 장례를 치르는 周瑜。 孫権も 울고 모든 병사들이 통곡했지만 周瑜は 무너질 수 없었음. 자신의 벗이 남긴 것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전부 지켜야 했으니까. 그런 周瑜の 곁엔 늘 明儼が 있었음.

    周瑜は孫権が 형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늘 孫権に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明儼 역시 周瑜に 따라 孫権を 대우했고, 孫権は周瑜のことを 친형처럼 여기고 따른 만큼 明儼も 의동생처럼 대함. 역시 저는 孫権の 첫사랑은 周瑜だと 생각하기 때문에... 孫権と明儼が 각자가 周瑜を 사랑함을 알고 있었지만 사나이답게 周瑜の 뜻을 존중하고 서로 사람 대 사람로서만 대화했음 좋겠음...






    後は続きに!読んでくれ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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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ゆみは

    DONE1. タイトルは、宮崎駿先生の「もののけ姫」のアシタカのセリフで引用しました。

    2. 情事の表現が間接的に入れています。
    鄭弓 — 生きろ、きみは美しい‼️名前とクラスなどは日本語で表記されています。







    周瑜は 느리게 눈을 떴다. 아직 어둑한 방의 천장이 흐릿한 시야에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周瑜が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했다. 묵직하고 단단한 팔이 그를 꼭 감싸고 있었다.

    「......」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입술이 도로 닫혔다. 鄭が 깊고 평온한 숨을 고르며 달게 자고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빼낸 周瑜が 그의 팔을 제 무릎 위에 얹어놓았다. 비녀를 풀어내린 옅은 금발의 머리칼이 크고 작은 붉은 자국들로 뒤덮인 등 위로 흘러내렸다.

    「...으음...」

    뒤척이던 鄭が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선 품으로 파고들었다. 곱슬거리는 청록의 머리칼이 판판한 배를 간지럽혔다.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웃은 周瑜が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주었다. 두툼한 비단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어깨엔 고된 훈련과 전투가 남긴 상흔이 가득했다. 거친 풍파를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꺾이지 않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살아남았기에 짊어져야 하는 흉터들이다. 하얗고 작은 손가락이 울퉁불퉁한 흔적들을 가만히 훑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금안이 애틋한 색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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