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새끼가 음악한다고 설치는 건 미친 짓이다.
오한솔은 강의를 마치자마자 밀려 나가는 인파에 섞여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에브리타임 음대 게시판에서 교수가 또라이네 강의 질이 어떻네 가타부타 떠들썩하던 강의다. 악명답게 첫 수업부터 교수는 화려한 펀치라인을 날렸다. 돈 없는 새끼가, 아니, 사람이랬나. 음악한다고 설치는 건, 이것도 설친다는 단어를 똑같이 썼던가. 그냥 음악한다고만 했던가 문장이 끝나자마자 불쾌한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숨을 내뱉은 탓에 옆에 앉은 남자가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다. 악플이 관심의 반증이듯이 웬만한 소형 강당 크기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분명 그때의 오한솔은, 옆 사람이 흠칫 놀라 다시 시선을 돌릴 표정을 짓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교수가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찍 도착한 덕에 적당한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서 망정이었다. 맨 앞줄에서 그러고 있었다간 그 교수가 틀림없이 눈치챘을 테고, 1학년 1학기 첫 강의부터 척지는 교수가 생겼을 거다. 오한솔은 물처럼 평안히 흐르는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었다. 누구와도 척지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이 얼마나 사람 정신을 갉아먹는지, 송향 콩쿠르 준비 과정에서 걔네와 살부대끼며 지낼 때 뼈저리게 느끼고 온 자신이다.
대학생 간의 가십은 고등학생들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볍게 퍼져나갔다. 누가 자퇴했다네, 반수했나 보지. 누구랑 누가 양다리 걸쳤대, 걔네 안 그래도 존나 러브버그 같았어. 누가 경상관 입구에 똥 지림, 미친. 오한솔은 그 가십에 이름 한 줄 올릴 생각 없었다. 평화롭게, 비유를 맞추면서, 적당히. 새터가 끝나고 불판 위 남은 삼겹살을 집어 먹으며 가장 처음 다짐한 생각이었다. 너 귀엽게 생겼다며 사근사근 웃어주는 선배에게는 그에 맞는 미소로 화답했다. 술 처먹고 속 뒤집혀서 토하는 동기는 등을 두들겨줬다. 송향예고 출신이야 거기 아는 애들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을 들먹이는 선배 앞에선 나중에 그분도 소개해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개해 준다 해도 받을 생각 없지만. 그는 음악계의 뿌리 깊은 친목이 영 거북했다. 그 관계를 잇기 위해선 허허실실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대화만으로는 부족했다. 실력보다도 인맥이 필요했고, 인맥을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삼시세끼 밥 먹고 눈 뜨고 일어날 때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그 숫자들이. 마음 놓을 구석은 대한민국에는 송향예고 이외의 예고가 많다는 점뿐이다. 그곳에서 온 학생들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재벌 집 아들이라 불렸다가 그 새끼가 학교에 쳐들어온 일이나, 무대에만 서면 개 또라이가 된다는 소문 따위 들어봤을 리가 없다.
대학에 가면, 좀 더 실력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거라고, 심은주 선생님처럼 재능을 알아봐 줄 눈을 가진 참스승이 한 사람은 있을 거라고 기대를 품었건만. 결국 돌아온 곳은 좀 더 큰 운동장을 가진 송향예고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생각이야 어쨌건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오한솔의 이미지는 대략, 송향예고 출신 성격 좋은 성악과 1학년, 거기다 꽤 잘생기기까지 하다는 정도로 굳어졌다.
강의실 밖으로 나간 학생들은 제각기 자기 갈 길을 찾아 흩어졌다. 인파가 쓸고 나간 건물 안은 무섭게도 고요해졌다. 시간은 다섯 시에서 21분 모자랐다. 바깥은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초봄의 서늘한 바람에 벽돌 건물 냄새가 섞여 들었다. 춘분을 앞둔 3월이건만 세상엔 여전히 찬 기운이 남아있었다. 오한솔은 후드집업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바깥 온도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텅 빈 속이 울렸다. 그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주린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아침도 마시다시피 해결하고, 점심은 먹지도 못한 참이었다. 이대로 기숙사에 가서,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역 근처 맥도날드 야간 근무를 시작하러 간다. 머릿속으로 두루뭉술한 계획이 그려졌다. 오늘 저녁 뭐 나오더라 스크롤과 터치 몇 번에 곧바로 메뉴가 나왔다. 흑미밥에, 콩나물국, 오징어 진미채, 어묵조림…. 이 정도면 준수하다. 디저트 구색으로 바나나까지 나온다. 진수성찬이지.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린 그는 기숙사동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식당은 지하층에 있었다. 식권을 끊은 그는 학생들 뒤로 줄을 섰다. 이것저것 음식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에 맞춰 고픈 배가 요동쳤다. 오한솔 밥 먹냐 정신을 딴 데다 놓고 있었더니 누가 옆에 오는 줄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은 성악과 한 학년 선배였다.
"너도 수업 이 시간에 끝나 1학년인데 많이 늦네."
"시간표가 이래서요. 저녁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존대하지 마라니까, 어후 어색해. 먹고 바로 기숙사로 가"
"네, 뭐. 이따 알바하러 가서요."
"바쁘네, 열심히도 산다."
잡다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순서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쟁반과 식기를 집어들었다. 그릇에 담긴 반찬을 받아 올리면서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선배는 다른 일정 있으세요"
"나 존나 들이부으러 가지."
"바쁘게 사시네요."
그 말이 마음의 어디를 건드렸는지 선배는 옆구리를 팍 치며 웃었다. 하마터면 양손에 든 쟁반 엎을 뻔했다. 먹는 중에도 선배의 말은 끊이질 않았다. 대다수는 시답잖은 남의 이야기였다. 음대 누구가 어느 예고에서 뭘 했고, 누구는 집이 삼십 채 있는 재벌집 따님이고, 누구는 학기 시작부터 아주 큰 일이 났다던가. 그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기계적으로 밥을 씹었다. 재벌집 따님 얘기가 나왔을 때는 고서영을 떠올렸다.
잘 지내려나, 잘 지내겠지만. 송향 콩쿠르가 끝나고 고셔영은 바라던 쇼팽 콩쿠르의 문을 향해 박차고 내달렸다. 그 콩쿠르가 폴란드에서 개최된다는 것도 고서영이 비행기를 탄 지 2주는 지나서야 알았다. 애당초 섞일 일 없는 재벌가 따님이셨다. 그가 모르는 추운 나라로 떠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서영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선배는 그럼 잘 가라며 다시 한 번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 많은 것 빼면 사람이 나쁘진 않은데 말이 많아서 나쁜 사람이다. 하필이면 테너이기까지 해서, 톤 높은 저 목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에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한솔은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뒷머리를 헤집었다.
기숙사는 기본 2인 1실이었다. 룸메이트는 3학년 복학생이었는데, 며칠 간격으로 여자가 바뀌었다. 본인부터가 여자에 미친 새끼였고 여자들도 (사람마다 달랐지만 대다수는)그에게 맥을 못 추렸다. 같이 방 쓴지 고작 3주 지났는데 여자친구가 두 번 바뀌었으면 말 다 했지. 그래도 방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둬 놓는다거나, 코 고는 소리가 바리톤 다섯 명 모아놓은 수준이라거나, 새벽 3시에 햄버거를 시켜먹는 진상짓은 하지 않아서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방에 자주 없었다. 분명 새로 사귄 유아교육과 여자친구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이왕이면 내일까지 안 와도 괜찮다는 텔레파시를 보내며 그는 다른 일에 신경을 돌렸다.
같은 여미새인 임찬결은 저렇게까지 난잡하게 놀진 않았는데. 비단 고등학생이라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교에 먼저 입학한 임찬결은 한 번뿐인 20살을 남김없이 즐겨보겠다면서 이태원 클럽 홍대 헌포 가리지 않고 쫓아가더니 11월 어느 날 돌아와서는 '우정이 최고다.' 라는 말과 함께 그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우정이 답이라며 감자튀김이나 하나 달라고 하는 그를 보면서, 여긴 맥도날드지 고깃집이 아니라며 정중히 문밖으로 모실까 고민했지만, 배움이 있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몰래 감자튀김 한 봉지 끼워줬던 게 고작 작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면 그쪽 학교에서도 여전히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원체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라 친구도 많은 것 같고. 오한솔은 가끔 그의 스토리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연락을 대신했다. 한번 보자고 약속을 안 잡은 건 아니지만 1학년은 바쁘고, 저쪽은 2학년이라 바빴다. 블러처리된 사진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웃는 임찬결의 모습을 보면 정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즐거워 보인다. 걔가 잘 지내서 다행이지. 임찬결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방안은 남자들 사는 기숙사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깔려있었다.. 창문을 열자 바깥의 추위가 확 끼쳤다. 그 사이로 새로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사람이란 간사한 동물이라 이 정도 방이면 만족하지 싶다가도, 막상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고쳐놓고 싶고, 그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 불만이 생기는 거다. 바깥 공기를 마시다가 안으로 고개를 돌리면 쿰쿰한 냄새가 더 짙어지는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다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던 하늘은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다. 야간근무는 10시에 시작했다. 잔다거나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자니 부족하고 그냥 죽이자니 아까운 시간이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던 오한솔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밀린 빨래라도 해치우고 가면 딱 알맞을 시간이었다. 운 좋게도 남은 세탁기가 있었다. 그는 세탁실 앞에서 가득 찬 빨래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방 안에서 긁어모은 양말이며 속옷 따위와 간절기 옷을 한데 몰아넣고는 시작 버튼을 누르자 세탁조가 돌아가며 둥둥거리는 소음을 냈다. 오한솔은 그 위에서 돌아가는 통을 내려다보았다. 끝나기까지 한 시간 반, 건조까지 돌리면 세 시간. 그동안 계속 돌아갈 이 통. 아주 잠깐, 그게 자기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너희를 정말 미워했는데.
그런 마음도 이제는 세탁조 안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심은주 선생님께서 고작 이런 시간을 보내라고 대학 등록금을 내주신 건 아니었을 터였다. 이미 지난 이야기이지만 송향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건 오한솔과 임찬결 팀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 아닌 상패를 바라보며 그는 씁쓸하게 박수를 보냈다. 무대 위에 선 사람은... 결과가 뭐 중요한가, 그가 속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기분으로 회장 밖으로 나온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텐데.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할 거라고 믿었는데. 심은주 선생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또 다른 이야기를 제시했다. 회장 밖 공기는 살이 에일 듯 차가웠다. 입김 사이로 들었던 선생님의 목소리에 오한솔은 지금껏 해본 적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패자부활전이야. 네 재능을 이대로 끝내는건 아까우니까, 대학에 가보자. 등록금은 선생님께서 지불하신다. 생활비는 그의 몫. 이후 선생님께서 납득하실 만한 콩쿠르에서 상을 탈 때마다 한 학기씩 등록금을 받는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걸 알지만, '납득할 수 있는'의 기준은 서로가 이 정도 규모의 콩쿠르라고 동의했을 때 정해진다. 그의 마음속엔 자존심이든 뭐든 없었다.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다 큰 녀석이 선생님 앞에서 꼴사납게 울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선명하지 않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를 때리는 비프음에 그는 번뜩 머리를 올렸다. 어느새 세탁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세탁실 앞에서 같은 기숙사 선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의 양손에 사이좋게 들린 빨래바구니를 보아하니 목적은 비슷했다.
"거기서 뭐해."
"아... 세탁이요."
"아오, 놀라라. 귀신인 줄. 왜 그러고 서 있어"
"생각을 좀 하느라..."
"생각을 세탁기 보면서 하냐 웃긴 놈일세."
"하하... 양말 한 짝이 안보여서요."
맥도날드까지는 음악 세 곡을 들으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아르바이트는 작년, 정확한 시기로는 고3말 부터 시작했다. 굴지의 송향예고라지만 역시 고3 마지막 학기에는 빠지는 학생들이 드물지 않았다. 대부분은 유학을 간댔고, 대학 붙었다고 배째라는 녀석도 있고. 그의 사유는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어서였다. 여윳돈 많아서 나쁠 일은 없지 않은가. 오한솔은 중국제 5만 원 블루투스 이어폰을 양 귀에 꽂았다. 베이스가 뭉개진 헤비메탈이 고막을 울렸다. 좋아서 듣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지 않는데도, 계속 듣다 보니, 결국 좋아하는 걸 찾을 수 없어 계속 듣고 있었다. 그는 스와이프를 반복하며 다음에 들을 곡을 찾았다. 클래식, 식상하다. 인기차트 탑 100, 매장 안에서 주구장창 듣는다. 그 밖의 음악 장르, 도전해본 적 없다. 알고리즘에도 보이지 않는 음악들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새 곡은 다음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장르는 헤비메탈이었다. 예상한 순서를 따라 베이스의 낮은 음조가 들렸다. 어느새 갈 길의 중반도 넘어섰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그는 10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의 아르바이트 내용을 복기했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번호표를 보고, 햄버거를 만들고, 감자튀김을 튀기고, 손님들이 나간 자리를 치우고, 중간마다 키오스크 용지도 갈고. 학교 근처 매장은 혈기왕성한 스무 살들이 술 처먹고 진상 파울때를 제외하면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배달이 많이 들어오는 건 별로였지만. 어느새 음악은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갔다. 저 앞에 맥도날드 간판 불빛이 보였다. 도착하기까진 몇백 걸음 더 걸어야 했지만 오한솔은 일부러 이어폰을 먼저 빼냈다. 같은 자리에서 돌아가는 알고리즘을 더 겪고 싶지 않았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그는 성악과답게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솔님 안녕하세요"
"어, 한솔이 왔네. 한솔이 안녕 우리 배달 완전 많아. 큰일 났어."
같은 타임에 일하는 카운터 크루 누나가 손가락으로 영수증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싹 다 배달. 미친 거지."
오한솔은 맥없이 파하, 숨을 뱉었다.
"미친 거네요."
이후는 일의 연속이었다. 배달준비를 하는 동시에 키오스크로 들어오는 주문을 확인하고, 그와 동시에 손님이 나간 자리를 치웠다. 중간마다 현금으로 결제해야만 한다고 우기는 손놈들과 평범한 기프티콘 사용자들을 상대하고 8시가 되기 전 쓰레기통을 한번 비웠다.
"어머나 어떡해, 죄송해요."
"아녜요, 저희가 치울게요. 물티슈는 벽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어떤 꼬마가 맥플러리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당황한 아이 어머니와 달리 오한솔은 익숙하게 대걸레를 가져왔다. 말라붙기 전에 치우지 않으면 곧 끈적끈적해진다. 맥플러리 뚜껑이 반쯤 열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우유 냄새나는 액체가 흘러나왔다. 직접 만들 때는 신선한 크림 향이 나던 것이 대걸레에 닦이자 우유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사이에서 그는 박다슬을 떠올렸다.
친하다고는 못할 사이였지만, 박다슬은 단 걸 좋아했다. 언젠가 고등학생 때의 그 애들이 전부 맥도날드에 모인 적이 있었다. 계기는 가물가물했다. 뭔가 경연을 준비했던 것도 같고, 하여간 심은주 선생님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큰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선생님께선 각자가 먹고 싶은 햄버거 세트와 사이드 하나를 시켜주셨다. 임찬결과 같은 것을 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애플파이까지. 박다슬은 그때 사이드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먹던 아이스크림 다음으로 맥플러리를 시켜도 되느냐 물었다. 선생님께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서영과 함께 키오스크로 향하는 걸음이 경쾌했다. ■■■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개 시키면 안 돼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목 건강 생각해. 그래도... 주변 소음 사이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의 옆에 앉은 이태의가 물었다. 너도 아이스크림 먹을래 ■■■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아하니 자기가 먹고 싶은걸 남한테 물어본 게 틀림없었다. ■■■가 센스 좋게 받아치지 않아서 그렇지. 걘 그런 면이 있다니까. 맥플러리를 손에 들고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박다슬은 쟁반 하나를 양손으로 받친 채 돌아왔다. 나만 먹기 미안해서, 다 같이 먹자고 샀어. 쿠키 앤 크림으로 시켰는데 괜찮지 싫다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생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기 컵을 가져갔다. 임찬결이 유독 신나서 가져갔던 기억이 뚜렷했다. 잘 먹을게. 오한솔 또한 그렇게 인사하며 자기 것을 가져갔다. ■■■는 가져가지 않았다. 미안, 아까부터 목이 따끔따끔해서... 감기인가 박다슬은 깜짝 놀라 연신 미안하다 말했다. 괜찮아, 뭐. 내가 말 안 했는데. 다슬이 너 먹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져가는 손을 보는 ■■■의 눈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태의는 그런 ■■■를 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힘겹게 뗀 첫마디는 이러했다. 내 거 한입 줄까 컵을 쥔 오한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종이컵에 손톱자국이 났다. 눈치채는 사람이 없도록 계속 들고있었다. ■■■는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들고 있던 플라스틱 숟가락을 건넸다. 한입만 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도 않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컵 안으로 파고들 것처럼 굽어지던 손가락은, 점점 더 주먹을 쥐는 형태에 가까워지고, 마지막 임계점을 넘었을 때. 퍽, 소리와 함께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그 단단한 맥플러리 컵의 허리가 옆으로 구겨져 있었다. 소리에 놀란 일행들의 시선이 꽂혔다. 아차, 미안 다슬아. 먹다가 떨어트렸어. 오한솔은 그렇게 웃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분위기가 잠시 술렁였다. 떨어트린 건 내가 닦을게. 사준 건데, 정말 미안.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 이태의의 것을 먹을 리 없다. 오한솔은 그것만으로도 승리를 쟁취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일은 그 정도 해프닝에서 끝났다.
오한솔이 줘도 못 먹은 날.
대걸레 물기를 짜내자 우유비린내는 더욱 역하게 올라왔다. 박다슬은 고서영과 같이 비행기를 탔다. 걔까지 폴란드에 간 건 아니고, 오스트리아인가, 오스트레일리아인가. 아무튼 거기에 간댔다. 고서영과 달리 박다슬의 근황은 가끔 찾아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부잣집 따님. 사진 속의 박다슬은 돈 많은 집에서 사랑 많이 받은 막내딸처럼 웃고 있었다. 한 장의 사진도 빼놓지 않고. 휴게시간이 되면 그 사진들에 좋아요를 눌렀다. 사진 속 박다슬은 이태의와 닮은 남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태의 걔는 뭐 하고 사나. 적어도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는 안 하겠지. 심은주 선생님과 해외로 나간다는 얘기는 들었다. ■■■는 슬퍼하지 않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보내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를 기억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이태의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걔가, 그 새끼가, 늘 옆에 붙어 다녔으니까. 누구 보기 좋으라고. 오한솔은 일부러 대걸레를 세게 내리찍었다. 우유 섞인 수돗물이 배어 나왔다.
■■■를 잊기 위해선 그 애와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씩 골라내야 했다. 수업을 들었던 일, 반주자로서 무대에 올라선 일, 노래방 의자에 걸터앉아 생겼던 일, 눈 내린 골목길을 걸으면서 같이 웃었던 일.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시간들을 발라내어 저 밑으로 처박아야만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 피아노를 치는 ■■■,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한 ■■■, 나를 보며 웃지 않는 ■■■, 나를 보면 웃지 않는 ■■■... 나를 보면 웃는 ■■■. 생각을 멈출 수 없으면 일에 집중했다. 햄버거를 포장하고, 감자튀김을 튀기고,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는 동안에는 머리가 작동하지 않았다. 276번 고객님, 276번 고객님
불러도 오지 않는 손님이 꼭 있다. 같이 일하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오한솔을 향해 손짓했다.
"한솔아, 이것 좀 불러주라. 안 들리나 봐, 아 진짜."
오한솔은 목을 가다듬었다. 성악과 좋은 게 뭔가. 그는 배 안에 호흡을 밀어 넣고는 소리쳤다.
"276번 고객님"
그제야 햄버거 주인들이 행차하셨다. 중년 부부(이런 시간에 오는 사람들은 불륜일 가능성이 높았지만)로 보이는 둘은 무슨 아르바이트생 목소리가 저렇게 크냐는 둥, 일부러 저런 거 아니냐는 둥 구시렁대더니 사라졌다. 뒤에서 크루 누나가 엄지를 들었다.
자정을 앞둔 시간이었다.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이 들어왔다. 조리대에서 너겟을 튀기던(사실 이 일도 매뉴얼대로라면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번호가 뜬 화면을 보았다. 빅맥에 감자튀김, 콜라. 튀기던 너겟을 마저 꺼낸 뒤 그는 햄버거 조립에 들어갔다. 본래 이 일은 그릴 크루가 맡아야 하지만 마침 햄버거 담당인 형이 화장실로 간 직후였다. 카운터 크루인 그의 일은 아니었다 한들 어차피 세 사람 중 한 명이 해야 할 일이었다. 심야 시간의 분업은 매뉴얼이 예상하는 것보다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참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 두 장, 익숙한 CM송이 입에서 맴돌았다. 한가한 시간이라 느긋하게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도 그때 빅맥을 먹었다. 어떻게 이런 세세한 것까지 떠올리느냐 하면, 임찬결 옆에서 같은 걸 시킬 때 난 빅맥 먹을래, 다른 건 안 먹어봤어. 그렇게 말하는 ■■■의 목소리를 기억해서였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럼 나도 그거 먹을래. 라는 이태의의 목소리를 들어서였다.
"314번 고객님, 314번 고객님."
불러도 오지 않는 손님이 또 있었다. 카운터 크루 누나가 다시 한 번 오한솔의 등을 툭툭 쳤다.
"부탁좀 할게. 나도 성악 배울까 봐."
"나 참...
314번 고객님"
큰 소리로 번호를 부른 뒤, 그는 성악 힘들어요~ 라며 대화의 박자를 맞췄다. 이 누나는 매장 터줏대감인지라 무뚝뚝하게 굴어서 좋을게 없었다. 그의 멀대같은 키와, 나쁘지 않은 이목구비는 무릇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관심을 끄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 네가 좀 가르쳐줘."
"저 과외비 비싼데요~"
"직원 할인 안 돼~"
그러니까 이 누나도 말끝마다 콧소리가 붙지. 314번 고객님께서는 오지도 않으셨다. 오한솔은 카운터 뒤를 내다보고는 눈웃음으로 양해를 구했다.
"누나, 미안해요.
314번 고객—"
허공을 보면서 부르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번호의 주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저... 314번 인데요."
그 애는 번호표를 들어 보여주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손끝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오한솔에게는 꺼낼 수 있는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가져가도 되겠냐는 듯 쟁반을 받아들었다.
"여기서 일하는 줄 몰랐네."
김신비는 말을 마치곤 어색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마주치면 안 될 곳에서 사람을 마주친 양 무마하는 웃음이었다. 쟁반을 든 김신비는 어떻게 대화를 끝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르듯이 끝을 내버린 쪽은 외려 오한솔이었다.
"...가져가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세요."
매뉴얼 상 마지막 말은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무슨 말이라도 덧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리낌 없이 나왔던 농담 따위가 무력해졌다. 김신비의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정신력이었다. 김신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한솔은 카운터 끝에 손을 기댔다. 아, 최악이다. 최악의 재회다.
저번 주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오한솔은 이번에도 강의실 중간 자리에 앉았다. 양옆은 지각을 겨우 면한 학생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교수는 갑자기 출석을 부르겠다며 컴퓨터 스크롤을 넘겼다. 어림잡아 수십 명은 넘을 머릿수를 하나하나 세고 있는 거다. 전자출결의 시대에 우스운 촌극이 따로 없었다. 강연솔, 네. 강연우, 네. 고희인, 네. 지루하다, 지루해. 그는 오늘 차 피피티 자료를 쓸어내렸다. 당근마켓에서 5만 원에 거래한 갤럭시탭은 조금만 밝기를 올려도 나 죽는다며 열을 올렸다. 3월까지는 이론수업으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는 스크롤을 내리며 바흐가 어떻고, 쇼팽이 어떻다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눈으로 훑어 넘겼다. 음악을 공부하는, 적어도 관련 다큐멘터리라도 한 편 봤다면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만 모여있었다. 수업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나 수업 엿 같으면 강의평가에 다 써버리라는 선배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알코올 가득 들어간 조언이니 거를 부분은 걸러야 했지만 오한솔은 정말 구리면 강의평가로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을 끌어안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김채령, 네. 출석은 아직도 ㄱ 자 성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태윤, 네. 그것도 아직 김 씨다. 학생이 어지간히 많기도 하나 보네. 사람 사이에 껴있으려니 공기가 영 답답했다. 감기는 눈을 비집어 뜨며, 그는 오 씨까지 오려면 몇 분이나 더 기다려야 할지 예상했다. 김신비,
그 이름에 오한솔은 감전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 세 음절에 목 뒤에서 아드레날린이 팽팽하게 솟구쳐올랐다. 김신비, 설마, 그 김신비 에이, 그럴 리 없지. 동명이인일 거다, 그 김신비가 여기에...
"네."
있네.
그 김신비가 맞다. 세줄 앞의 익숙한 뒤통수가 대답했다. 김신비, 김신비가 왜 저기 있지 유학인가 뭔가 가서 지금쯤 지구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국내 대학 수업에 껴 있을 게 아니라. 교환학생인가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떠난 지 1년도 안 된 학생을 다시 내보내는 정신 나간 학교가 어디 있어. 오한솔은 주변에 폐가 될까 큰 소리로 당황할 수도 없었다. 김신비의 동그랗고 까만 뒷모습이 오한솔의 심정은 상관하지도 않고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는 여전히 이름을 불렀다. 신지원, 네. 심강혁, 네. 안예지, 네. ㅅ에서 ㅇ으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귀로 스치는 이름을 반대쪽 귀로 흘려넘긴 그는 김신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김신비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학생들 틈바구니에 껴서 최대한 없는 사람인 척 나가는 방법이 뭐가 있지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까 쟤도 내가 여기 있는 거 모르지 않을까, 오한솔이라는 이름이 어디 한둘이야. 아니, 그 전에 왜 여기 있는 거야 같은 학교였나 그럴 리 없는데. 하필이면 수업을 들어도 이걸 듣냐, 응 오지윤, 네. 오한솔, 오한솔, 학생 안 왔나
"아, 네"
"있으면 바로바로 답을 해야지... 윤정후."
망할, 망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하다못해 콘센트 구멍 안에라도 끼어있고 싶었다. 오한솔은 귓가가 새빨개지는 기분으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아주 여기 있소 동네방네 광고를 해라, 미친 새끼야. 김신비가 모를 리 없다. 자신의 바리톤 성대가 지금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은 지난주 맥도날드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처음이었다. 교수는 십시일반 출석을 정리했고, 앞으로도 불시에 직접 출석을 부를 테니 출튀할 생각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크린에 띄워진 피피티를 보면서도 저게 글자고 저게 사진인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김신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앞줄 전등을 끄자 스크린 불빛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 진 뒷머리가 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빛났다. 손을 뻗을 수 있다면 그 끝을 만지고 싶었다. 쟤도 스무 살이 되었을 텐데, 뒷모습은 고등학생 시절과 달라진 게 없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저 뒷모습을 보며 중학생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글동글하고 땅딸막해서, 손으로 쓰다듬으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이 감겼던 것까지. 손가락 사이로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던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도 같은 샴푸를 쓸까 고등학생 김신비에게서는 물에 젖은 비누 향이 났다. 향에 조예가 깊지 않은 오한솔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중학생 김신비에게서도 같은 향이 났다. 장난삼아 냄새를 맡았을 때 김신비는 몸서리치며 품에 안긴 몸을 옆으로 틀었다. 무슨 샴푸를 쓰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사다 준 거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 답네, 그렇게 웃자 김신비는 무슨 뜻이냐며 마주 웃었다. 강의 내용을 뒷배경삼아 오한솔은 즐거운 한때,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렸다.
세 시간 강의가 물처럼 흘러갔다. 쉬는 시간 없는 대신 일찍 끝내주겠다는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불만도 찬성도 나타내지 않았다. 중간자리에서 보니 절반은 다른 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자거나, 하여간 딴 세상에 가 있었다. 김신비는 절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피피티를 넘기면서 뭔가를 적기도 하고, 교수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등 아주 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화면을 스와이프 해서 카톡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것까지 알아차린 시점에서, 오한솔은 자신이 보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알 만큼 수완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오한솔은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가 뒷줄에 있다는 걸 김신비가 못 알아차렸을 수가 없었다. 수업도 그렇게 꼼꼼히 들은 애가 출석 땐 얼마나 제정신이었겠는가. 그는 기숙사 앞까지 도착해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냐...
그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미뤘던 생각이 한 번에 날뛰어서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학기는 이미 시작했다. 이런 일로 휴학을 때린다든가, 그런 형편 좋은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선생님께 받은 돈으로 얻은 하루하루다. 매일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모자를 판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만. 그만 생각하자. 김신비든 뭐든 이제 내 인생에서 없는 거야. 새로운 인생을 살 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거다. 그곳에 김신비는 없다. 없어야만 한다. 기숙사 방에 돌아오자 룸메이트 형이 이층 침대에 누워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룸메이트 형에게 꼭, 무조건 세 시간 후에 깨워달라고 부탁한 뒤 알람 다섯 개를 맞춘 오한솔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 꿈으로조차 도망칠 수 없었는지, 김신비가 나왔다.
반주자용 드레스를 입은 그 애가 손을 잡았다. 생채기가 베인 자신의 손과 달리 부드러웠다. 주변은 익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골목길이었다. 김신비는 마냥 웃으며 그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햇빛처럼 쏟아지는 광채가 얼굴선을 따라 비쳤다. 빛은 아래로 향했다. 눈썹 끝, 콧대, 입술, 그 아래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흘렀다. 파리하게 떨리는 속눈썹과 그림자 지는 쇄골뼈 사이에서 오한솔은 애써 시선을 위로 고정했다. 말을 할 때 마다 벌어졌다 닫히는 김신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애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처럼 끌어당겼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맞췄다. 오한솔, 이리 와.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미소 띤 얼굴이 빛을 받아 부서지듯 반짝였다. 내가 많이 미웠어 김신비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눈이 아릴 만큼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던 것도 같고. 지금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확답할 수 없어 질문을 던졌다.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원래 맥박이 빨라져 지금 너를 볼 때처럼, 목 뒤에서부터 번쩍번쩍하는 느낌이 들어 김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가만히 선채 뒤돌아보았다. 오한솔, 너,
내가 보고 싶었지
순간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소리를 질러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수치심인가 아니, 그보다 더 불그죽죽하고 귀 끝까지 타오르게 만드는 감정이다. 황홀경은 설탕 조각처럼 부서져 조각조각 떨어졌다. 그는 김신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낚아챘다. 순간 눈앞이 어지럽게 비틀렸다. 김신비는 그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말로 소리를 질렀다. 김신비, 신비야 돌아가는 세탁조처럼 비틀어진 풍경 사이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귀청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점점 더 견딜 수 없이 불어났다. 오한솔은 두 귀를 막으려 했으나, 손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몸통도, 얼굴도, 그 자신의 어떤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고 싶었어도 눈꺼풀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으려 노렸했다. 그와 동시에,
"야, 야"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야, 오한솔 야 와, 이거 미안하다, 나도 잠들었어. 오한솔 일어나 세 시간 넘었어"
오한솔은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익숙한 이층침대의 프레임이었다. 잠깐, 지금 몇 시...
"형"
"미안하다니까"
9시 50분. 오한솔은 뒤도 안 보고 기숙사를 나갔다. 저 형을 믿은 내 잘못이다. 잠든 채로 알람을 꺼버렸는지 그 많은 알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끝나있었다. 그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포스기에 출근 시간을 찍었다.
"꼴이 왜 이래. 뛰어왔어"
"네, 하, 네엡."
카운터 크루 누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쳤다.
"옷 갈아입고 와. 지각은 아니네."
여전히 정신은 몽롱했다. 망할, 그 망할 꿈 때문이다. 거기서 걔를 봐서 그래. 오한솔은 냉장고 문을 여닫았다. 인공적인 냉기를 맞아서라도 머리를 되돌려놔야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린 오한솔은 유니폼 목깃을 잡아올렸다. 걔를 봐서 그래. 걔 손을 잡아서 그래. 아무것도 아닌 걔가, 내 꿈에 나와서 그래. 그는 스스로를 향해 계속 되뇌었다. 잠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김신비를 마주친 꿈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한솔이 너 괜찮아 어디 아파"
옆에서 보기에도 티가 났는지 같은 타임 그릴 크루 형이 걱정스레 물었다. 오한솔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며, 잠을 잘 못 잤다고 웃어넘겼다. 양상추를 손질하면서 수도꼭지를 안 잠근 것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케이준 소스로 가득 찬 상자를 엎었을 때도 그럴 수 있었다. 튀김기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감자튀김을 싹다 숯으로 만들어버릴 뻔했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오한솔은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애가 아니니 넘어간다지만 같이 일하는 형도, 누나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오한솔 너, 오늘 좀 이상해.
오늘 좀 이상한 오한솔은 다시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미쳤지, 어, 진짜 미쳤어. 꿈자리 좀 뒤숭숭했다고 알바 잘리려 고사를 지낸다. 꺼림칙한 예상도, 까발려질까 전전긍긍했던 생각 따위도 다 걔 탓으로 넘겨버린 그는 번호표를 손에 들었다. 325번 고객님, 타로 딸기파이 하나. 맥도날드가 올해 출시한 메뉴 중 단연코 최악이었다. 맛있는 거랑 맛있는 걸 합치면 당연히 맛있어진다고 생각하는 미친 임원은 누구일까. 빅맥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는 고상한 분이실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 한들 일하는 사람의 사견이고, 고객이 원하면 가져다줘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파이류는 15초 안에 완성된다. 카운터 크루 누나가 곧장 번호를 불렀다. 325번 고객님
누나는 한숨을 쉰 뒤 오한솔을 향해 까딱까딱 손을 흔들었다. 네, 성악과 성대 대령이요. 그는 순순히 머리를 내밀었다.
그래서였다. 안 좋은 생각은 다 걔한테 떠넘겨버려서, 그래서 그 애가 찾아온 거다. 325번 고객님
325번 고객님, 김신비가.
익숙한 얼굴이 이번엔 아무 말 없이 쟁반을 가져갔다.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제스처나 눈짓조차 없었다. 김신비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 끝. 끝인가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끝을 낼 수 있어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던 걱정이 무너져내렸다. 주춧돌 빠진 둑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오듯이 생각이 쓸려 내려갔다. 그는 종이봉투를 들더니 감자튀김 한 스쿱을 퍼담았다. 손님이라곤 저 애밖에 없었다. 다른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오한솔은 크루 누나를 뒤돌아보며 얘기 좀 하고 오겠다 선언한 뒤 카운터를 나갔다. 누나가 뭐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몸이 더 빨랐다. 등 뒤에서 나오는 정말 왜 저러냐는 볼멘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젠장할, 이게 다...
매장은 넓지 않았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타일에서 둔탁한 발걸음소리가 울렸다. 담판을 지어야겠다. 김신비, 걔랑, 그래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한솔은 막 파이를 입에 넣으려는 김신비의 앞에 마주 섰다. 감자튀김 봉투를 내려놓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왔어"
"오면 안 돼"
오한솔을 올려다보던 김신비는 이렇게 말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오한솔은 눈 아래를 찌푸렸다. 안될... 건 없지. 알바에게 손님을 가려 받을 권리가 있을 리 없다. 두 사람 사이로 버티기 힘든 정적이 흘렀다. 김신비는 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몇 번 씹더니,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목으로 넘길 즘에는 손등을 입에 대고 있었다. 입맛 제대로 버렸다는 얼굴이었다.
"이거 무슨 맛이..."
리프레시할 콜라 하나 안 시킨 테이블 위에는 오한솔이 가져온 감자튀김만 놓여있었다. 김신비의 손이 그쪽으로 향하자, 오한솔은 봉투 입구를 손으로 막으며 다시 그 애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고 먹어."
"대답은 네가 해야지, 오한솔."
그 말에 오한솔은 또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김신비는 자기 물음에 답을 했다. 오한솔은 김신비가 되받아친 물음에... 답을 안 했다.
"안 될 건 아니지, 근데... "
서두를 꺼내놓고 보니 막상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근데 뭐. 아무리 생각해도 오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금지는 아니라도 하기 싫은 일이 세상엔 여럿 있지 않은가. 얘는 그런 거 상관 안 하나 전남친 일하는 매장에 대충 후드티나 입고 햄버거 먹어도 아무렇지 않아
"...감자튀김,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김신비가 다시 이쪽을 본다. 오한솔은 그렇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무작정 들이닥친 건 좋았는데, 뒷심을 이끌어나갈 명분이 부족했다.
"너..."
오한솔은 눈시울을 가늘게 찌푸렸다. 빙빙 돌려갈 길이 영 보이지를 않았다. 꿈에서 본 김신비는 똑바르게 쳐다볼 수 있었다. 빛에 가려진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그 눈이, 까만 눈동자가, 현실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오한솔은 유니폼 내부가 다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자기가 건 싸움에서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은 자꾸 익숙한 방향으로 달려가자는 듯 그를 유혹했다. 오한솔은 찌푸렸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와 동시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유학 간다면서. 왜 그 수업 듣고 있어"
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진다거나 지구가 반으로 쪼개질 만큼의 불안감이 목전에 와 닿았었는데, 변한 건 김신비의 손짓뿐이다. 그녀는 뻗었던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자연스럽게 턱을 받쳤다. 말을 정리해야 할 때면 늘 보여주던 동작이었다. 몇 초가 흐른 뒤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어...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것보다 너, 일하는 중 아니야 앞에만 집중하던 오한솔은 그제야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다. 뒤를 돌아보자 카운터 크루 누나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라 손님은 안 왔지만, 근무태만으로 찍혀도 반박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는 양손으로 미안하다는 수신호를 만들며 허리를 숙였다. 크루 누나는 한숨을 쉬더니 알아서 하라는 듯 돌아서 버렸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안녕이라 말하고 제자리로 복귀해야만 했다. 오한솔은 감자튀김을 앞으로 밀었다. 국을 끓이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나 간다. 그거 맛없어, 달기만 해서. 네가 싫어할 것 같더라."
망할, 진짜 폼 안 나는 인사다. 전남친이라는 건 좀 더 멋진 장소에서, 페라리라든가 벤틀리 같은걸 타고 나타나 줘야 하지 않나. 페라리는커녕 햄버거 패티밖에 없는 기름진 장소에서 유니폼 입고 벌이는 작별이라니. 간지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김신비에게 오한솔은 영원히 맥도날드 알바하던 전남친으로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이 다른 생각을 깔아뭉갠 채 내려앉았다. 김신비는 봉투를 받아들지 않았다. 그 대신 뒤돌아서려는 오한솔의 등을 향해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한가해"
그 뒤로 이어진 말의 요는 이러했다. 한가할 때 보자. 내일 아니면 모레라도. 후에 오한솔은 그때 김신비가 어떻게 말했는지 떠올리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당시의 오한솔은 다시 한 번 감전된 사람마냥 멈춰 섰고, 김신비는 그런 오한솔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섰다. 다 먹지 않은 파이와 감자튀김을 한 손에 모아들고선. 오한솔은 얼이 빠진 채 카운터로 돌아왔다. 크루 누나가 옆에서 종알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한솔, 야, 정신차려, 결국 누나는 제기능 못하는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 아파요 누나—"
"너 이놈시키. 이거 휴게시간에서 깔거야."
고통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요령 좋게 넘어가려 들었다.
"좀 봐주세요~ 지금부턴 열심히 할게요. 진짜, 진짜로."
"오늘 전적이 한두 번이 아냐, 알긴 알어"
알아요, 알아요.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얼얼한 귀를 감싸 쥐었다.
오한솔은 그런대로 약속을 지켰다. 매장을 쓸고 닦고, 컵 리드와 빨대를 리필하고, 새벽 4시부터 맥모닝을 먹는 수상한 손님들을 응대했다. 기숙사로 돌아간 그는 무작정 침대에 드러누웠다. 룸메 형은 잠꼬대로 윤지야 서영아 얼굴 모를 여자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슬기, 가람, 혜정, 새롬, 신비. 김신비. 그는 베개를 집어들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걔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무슨 생각으로 전남친 일하는 데에 나타나서, 맛대가리도 없는 파이나 하나 시켜가지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돌아간 걸까. 생각을 더 하고 싶었지만, 다시 눈을 뜨자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