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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아케가 치한을 만납니다

    전철에서상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는 도쿄라는 도시 자체가 나를 배척하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아마 내 상황 때문에 더욱 그랬겠지만, 누구라도 이곳에 처음 와서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도 아무도 타인에게 관심 가지지 않는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일이 일어난다면 잠시 시선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일 뿐이다. 하기야, 관심이 전부 좋지만은 않지만.
    어쨌거나, 그중 가장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전철이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역사나 발 디딜 틈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차내를 가득 채운 승객들 따위, 고향에서 살 때는 그저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과장된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던 일들이 현실을 거의 그대로 모사해 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 역시도 내게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어느 날 등굣길. 시부야에서 환승한 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기가 텁텁했고, 땀 냄새와 향수 냄새, 데오드란트와 화장품 냄새 따위가 어지럽게 섞여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까지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앞으로 평생 몰라도 됐을 텐데. 그러나 앞으로 1년 동안은 싫어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별수 없이 가방을 끌어안은 채 모르가나가 짓뭉개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사람이 그토록 많으니 몸 이곳저곳이 밀리고 눌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쪽이야말로 이상하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덩달아 흔들려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의도치 않게 타인과 닿는 상황 정도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자주 일어난다. 내 엉덩이를 무언가 누르는 감각이 느껴져도 누군가의 의도가 담겼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남자니까. 키도 이 정도면 작지 않고, 별달리 여자로 착각할 만한 부분도 없다. 누가 나를 성추행할 마음을 먹으리라고는 농담으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반응이 늦을 수밖에.
    뭐랄까, 너무 현실감이 없어 놀라거나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나 같은, 남 일처럼 태평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고서야 불쾌감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다만 그것도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보다는 ‘어딜 가나 이런 놈이 있다’는 분노에 더 가까웠다. 카모시다나, 그날 밤 만났던 그 남자 같은 놈들 말이다.
    저항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지금 소란을 피우면 보호 관찰에 안 좋은 영향이 생길까.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이 더욱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또 누명을 쓰게 될까.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냥, 좀. 견딜까. 어차피 금방 내리는데. 딱히 수치스러운 것도 아니고, 딱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다른 사람이 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그런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사람, 치한이에요”
    등 뒤에서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누가 내 엉덩이를 만지던 사람의 손을 잡아챈 모양이었다. 큰 소리에 놀란 모르가나가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가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내 근처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 사람은 인파에 뒤섞여 도망쳐 버렸다. 인파에 휘말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비틀거리다 보니 역에 내린 후였다.
    “이런, 도망쳤네. 신고했어야 했는데.”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허둥지둥 모르가나의 머리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마스크를 낀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키는 나와 비슷한 정도일까. 남자치고는 제법 긴 갈색 머리카락이라거나, 늘씬한 몸매로 봐서는 연예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가끔 저런 사람이 있거든. 일부러 남학생들만 노리는 악질이야. 뭐, 여자를 노린다고 덜 악질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와 나는 금방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존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먼저 반말을 했으니 반말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과장되게 앗, 하는 소리를 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가 봐야겠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하지 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이쪽이 세게 나오면 오히려 쩔쩔매거든.”
    긴 문장을 조금도 헤매지 않고 단번에 쏟아낸 그가 깔끔한 자세로 몸을 돌렸다.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계단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작아지는 등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가방에서 다시 얼굴을 내민 모르가나가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치한 당했어.”
    “뭐”
    당황해 야옹거리는 모르가나의 머리를 묵묵히 쓰다듬으며, 나는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자면 나름대로는 놀랄 만한 일인데도, 나는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자체를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더 충격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겠지. 내가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후였다.

    *

    러시아워만큼은 아니더라도 전철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몇몇이 대화하는 소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웅성웅성 들려왔다. ‘헤어지기로 했었다고 내가 그런 적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너 그때 분명…… 아, 아니다.’ 언뜻 평범한 것 같은 대화 내용이 어째서인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표정이 밝았고, 이전보다 더욱 텅 비어 버린 것처럼만 보였다.
    나는 아케치를 흘끔거렸다. 그는 전철 문에 몸을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스쳐 지나가는 터널 벽뿐인데도.
    이전 같으면 그가 먼저 내게 다가왔을 텐데, 이제는 그럴 이유도 없다는 듯이 나와 그 사이에는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인가 서 있었다. 당연한 거리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영문 모르게 외로워졌다. 아니, 이유라면 있을까.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세계에서, 오직 그만이 나와 같은 감상을 공유했으니까.
    이런 세상은 이상하다고.
    어쩌면 반대로, 나와 아케치만이 이상한 걸까.

    전철은 덜컹거리며 계속 움직였다. 카스미가 팰리스를 보았다고 이야기했던 오다이바까지는 아직 한참 더 가야 했다. 전철이 멈추자, 몇 사람이 내리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탔다. 단숨에 비좁아져 나는 몸을 웅크렸다. 버릇처럼 가방을 끌어안으려다가, 내게는 가방도, 그 안에 든 모르가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하게 웃고 있던 낯선 얼굴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전철 안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조금 추웠다. 나는 다시금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변함없이 무뚝뚝한, 조금도 웃지 않는 얼굴로 창밖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쪽에는 시선도 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조금 분했다. 나만이 그를 계속 의식하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 대신 자백하러 출두한 것도, 세상이 이상해지자 바로 나를 찾아온 것도 아케치인데, 그런 주제에 내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쩌면 그렇게나 내가 싫은 걸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 마음을, 그저 이 이상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결심으로 참고 있는 것뿐일까 이전에 했던 말과 행동은 모조리 나를 뒤흔들어 놓기 위한 연기와 거짓말에 불과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고민해도 알 수 없는 질문을 나는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아케치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 달라진 점은 없어야 했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가 아까보다 더욱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지 내 시선을 눈치채서 금방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웬 남자가 수상할 정도로 아케치의 뒤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사람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치한이다.
    묻어 놓고 잊고 있었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길이나, 목덜미에 닿던 불쾌하고 습한 숨결 따위.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람을 반쯤 밀치듯 다가가자 아케치의 몸을 더듬는 손이 보였다. 그 손목을 빠르게 낚아채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사람, 치한이에요”
    “무, 무슨…… 치한이라니, 사람을 그렇게…….”
    승객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자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뭐랄까, 남의 엉덩이를 천연덕스럽게 주무르는 놈팽이치고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 외견이었다. 두드러지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고, 누구든 한 번쯤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만났을 법한, 평범한 남자.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이 사람이 성추행범이라고 과연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문득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창밖이 아니라 내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언짢은 듯한 표정이었다.
    왜
    덜컹거리며 전철이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남자가 나를 뿌리치고 전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탓에 휩쓸리듯 함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케치가 인상을 찡그리고는, 탐탁지 않은 듯 나를 따라 내렸다. 그의 등 뒤에서 전철 문이 닫혔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전철이 떠나고 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괜히 시간 낭비나 하고.”
    냉랭한 목소리였다.
    “뭐”
    시간 낭비라니. 그러면 그대로 놔두기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그 남자한테 무슨 짓을 당하든 내버려뒀어야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멍청히 반문하자 아케치가 팔짱을 끼고는 답했다.
    “어차피 별것 아닌 치한이야. 놔둬도 대수로운 짓은 못해. 지금 중요한 일은 그런 게 아니잖아.”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중요도를 그런 식으로 나눌 수는 없다. 그야 세상이 이상해진 사태에 비하면 사소한 사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치해도 괜찮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너도 싫잖아, 그런 짓 당하는 거.”
    나는 목에 걸린 답답함을 토해내듯이 그렇게 반박했다.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다. 싫을 것이다. 남이 멋대로 몸을 만지고,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취급을 받으면,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함부로 당하게 되면 당연히.
    당연히.
    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일이 정말로 싫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수치스럽지 않다, 불쾌한 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로 싫었단 말이야. 하지만 도무지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야만 겨우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어서. 그런데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나는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싫은 게 당연한 일이잖아.”
    그러니 돕고 싶었다. 누군가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때 그 남자가 나를 도왔던 것처럼.
    불현듯 기시감이 들었다.
    남자치고는 제법 긴 갈색 머리카락. 늘씬한 몸매. 나와 비슷한 키. 그때는 마스크가 얼굴을 절반 이상 가려 목소리도 다소 뭉개지듯 들렸지만, 눈매나 몸짓도 똑 닮아 있었다. 여태껏 몰라 봤던 게 이상할 정도로.
    나는 홀린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때 도와줬던 거 아니야”
    아케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를 강제로 끊어 버리듯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면 대답을 들을 기회는 없을 듯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케치”
    “건들지 마”
    순간 심장이 멎을 듯이 큰 목소리였다. 뒤이어 전철이 들어오며 더 큰 소리가 다른 소음을 묻어 버렸으나, 내 귓속에는 아케치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세게 얻어맞은 손아귀가 얼얼하게 통증을 호소했다. 문이 열리자, 아케치가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 하지 마. 가자.”

    그리고 오다이바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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