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난 거리는 식탁에 올라온 갓 구운 거위를 와인과 곁들여 먹는 작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이었다. 뒤가 구린 일을 몰래 처리하기 위해 뒷골목에 나방처럼 날아들면서도, 언제나 더 더러운 것을 본양 눈을 흘겼다.
거리의 어른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따라 배에 오르고 내렸으며, 몇몇이 영영 내리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리의 아이들은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닫고 서로를 챙기는 법부터 배웠다. 서로가 서로의 또 다른 가족이었다. 우리도 그랬다. 다섯 명의 악동들.
그래도 우린 고래잡이와 그 가족들을 위한 복지품을 받을 때면 감사를 표했다. 반대로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침을 뱉는다면 주머니를 몽땅 털어주었다. 더욱 나빠질 거리의 평판보다는 당장 오늘내일의 끼니가 더 중요한 삶이니까. 그래서 대부분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갱단만 빼고. 갱단은 싹수가 노란 악동들을 좋아했다. 좋게 말하면 보장된 자리의 러브콜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제발로 기어들어갈 진창이다. 주먹질 깨나 하고,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시궁쥐들의 미래란 으레 그랬다. 그 규칙을 깨버린 건 너다.
거리를 헤매던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너는 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시가지의 테러를 막은 공로로 검을 하사받은 뒤, 너는 길거리의 악다구니 싸움보다 절제와 기술의 아름다운 조화에 매료되었다. 싸움꾼이 아니라, 지키는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너의 변화를 목격하고, 지키고, 응원했다. 마침내 네가 멋들어진 정복을 입고 아지트 문을 박차며 들어섰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와 '너'로…
'나'와 '너'로 갈라지게 되었더라도.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대위까지 승승장구할 동안 우리도 꽤나 바빴다. 나름대로 불법에서 손 털기 위해 노력하느라. 한 놈은 암상인의 눈에 들고, 한 놈은 정보통의 수족이 되고, 한 놈은 문신 기계를 잡았다. 그래도 불법 아니냐고 꼬투리를 잡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갱단의 소속이 되었다. 놀랐지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으니 너는 아마 처음 듣는 이야기일 터이다.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네가 입단 시험을 준비할 때 필요했던 것들 말이다, 그건 길거리의 변변 찮은 부랑아가 마련하기엔 어려운 액수였지만 갱단의 유망주가 지원하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액수였다. 너에겐 영영 말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영영 보지 않을 생각도 했다. 대위님의 절친이 갱단 루키라니, 얼마나 구설수에 오르겠는가.
그래도 네 이야기를 종종 다른 녀석들을 통해 들었다. 처음 대위(captain)로 진급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너는 줄곧 고래잡이 배의 선장(captain)이 되겠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아침부터 땅 아래가 어수선했던 어느 날,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멍청하게도 상황이 얼추 마무리된 뒤에야 그게 섭정파의 쿠데타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 없이 네 근무지를 향해 뛰면서 그동안 내가 네게 건넨 모든 응원의 말을 곱씹고 후회했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네가 오늘만큼은 덜 무모하기를, 덜 용감하기를. 도착했을 때 보이는 건 핏자국과 처음 보는 병사들 뿐이고, 그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나서야 네가 남긴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너는 관저로 향한다고 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면서.
난 갱단의 유망주인 덕에 관저의 삼엄한 보안을 뚫고 잠입하는 일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네가 내 곁에 있었다면 높으신 분들이 밟는 땅이 얼마나 부드럽고, 그들이 마시는 공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우스갯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내 곁에 없었다. 그들이 뺏어갔기 때문에.
갑갑한 철모를 쓰고서도 한 눈에 너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내가 사랑하는 붉은색 덕분이었다. 노을빛보다 아름답고 불길보다 강렬한 붉은색. 꼭 누군가 무심히 엄지로 문지른 것처럼 온 몸으로 번져있는 붉은색. 반시체가 되어 끌려가는 너를 두고 군인들이 한 마디씩 모욕을 던졌다. 뒷골목에서 구르던 천한 거지놈, 시정잡배, 건방진, 어린 왕녀와 왕실파의 탈출을 도왔다, 본보기로 처형되고 거리에 시체를 매달 것이다, 좋은 꼴이겠지.
만약 내가 너와 같이 검술을 단련하고 정正도를 걸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곧장 군인들 사이로 뛰어든 나는 세 놈까지 베어넘겼지만 너에게 손 한 번 닿지 못하고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뒤에서 쏘아진 총탄이 가슴을 뚫고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 총구를 들이민 자는 쓰러진 괴한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욕을 했다. 그는 가장 최근 대위에 임명되었으며 가장 먼저 등 뒤에 칼을 꽂은 자이다. 그 대가로 자신의 집에서 등에 칼이 박힌 채 발견되었지만.
어쨌거나 당시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왕실파의 잔당 정도로 추정한 괴한을 다리 밑으로 던지라 명했다. 다리 아래 혓바닥처럼 넘실거리는 파도가 그것을 엉망진창 뜯어먹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차가운 수면에 충돌하여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가면서도 네 생각을 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맞은 편 거리에 살던 안나가 떠올랐다. 괴상한 컬트에 빠져 고래 뼈를 모으러 공장 뒷길을 오가던 그 안나 말이다. 나도 그 컬트란 것을 알았다. '공허'와 '이단신' 어릴 때 아이를 겁주는 용도로 되풀이 되던 이야기들 나는 반항적인 꼬맹이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어느 것도 믿지 않았고 안나의 행동도 비웃느라 바빴다. 마침내 그가 공장주에게 붙잡혀 주시자들의 손에 넘겨질 때도,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안나를 비웃지 못한다, 다만 여전히 동정하지도 않는다. 그가 그토록 매달리던 신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놈이었으니까.
싸늘하며 허망하고, 이따금씩 따스한 기운이 불어오는 공간에서 나는 신을 만났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내가 저승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자 그자식은… 대뜸 내게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제멋대로 이단의 낙인을 찍더니, 비참한 처지까지 비웃어대는 꼴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 공간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항변조차 없이 불편하고도 안락한 공간에서 쫓겨난 뒤 눈을 떴을 땐, 한 거렁뱅이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괜찮은 노인이라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마 지금은 티비아로 가는 배에 무사히 밀항해 있으리라.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나는 놀라운 일을 깨달았다. 내 몸에 깃든 마법의 존재를. 범인이 할 수 없는 곡예, 기행을 부리며 나는 잠시 환희했다. 그리고 의심했다. 대가 없는 힘이란 게 과연 존재하던가 곧, 나는 나의 대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눈을 뜬 날은 쿠데타로부터 열흘이 더 지난 날이었으니, 너의 처형일은 이미 일주일이나 지나있었다. 핏자국마저 희미해진 처형대 앞에서 깨달았다. 신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내게 선물을 준 것이 아니다, 절망에 몸부림치는 꼴을 보기 위해 준 것이다. 나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 이후론 너의 시체라도 찾아보려 애를 썼다. 당시 세상엔 어느 곳을 보아도 붉은 색이 만연했지만 내가 찾는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내게 남은 건 복수 뿐이었다. 너의 죽음에 연관된 마지막 한 놈까지 찾아내 그들의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 날, 나는 죽고 복수만이 새로이 태어난 셈이다.
검은 옷을 뒤집어 쓰고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죽음은 그들의 공포가 되었다. 경비를 두 배로 늘리고 값비싼 보안 장치를 설치해봤자 무엇도 나의 복수심보다 강하지 않다. 죽음이 날뛸 수록 날서는 공기와 황량한 거리는 내게 기쁨도 슬픔도 주지 못한다. 단지 깊은 밤 잠들어 너를 다시 만나는 순간을 바랄 뿐이다. 아니면 소란 때문에 잠들지 못한 너의 영혼이 내 주위를 떠돌면, 이 편지를 읽고 나를 책망해주기를.
너를 그리며, 양호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