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준비를 마치자마자 잔카는 서둘러 거처를 나선다. 요며칠 간지럽던 마음이 밤새도록 넘실이다 결국 오늘 아침 동이 틀 무렵, 하얗게 터져나왔다. 보고싶은 마음. 보고싶은 마음이 가득 찼다.
오늘은 꼭 들렀으면 좋겠는데.
남자를 만나려면 임시거처라 불리우는 이 사당의 폐 신사를 나와 수목이 우거진 바람에 일부 무너진 도리이를 지나고, 한 때 도시였을 폐허를 가로지르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지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야 한다. 사당 앞도, 폐허도, 도로도, 그 어디가 됐든 남자는 약속된 장소 외에는 만날 수가 없다. 만나주지 않는다.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훔치며 뙤약볕 아래를 걷다보면 마침내 이 섬의 끝자락에 위치한 약속의 장소가 보인다.
이곳이 아니면 너를 만나러오지 않겠다고 싸늘하게 말을 내려놓는 남자에게 잊혀질까 두려웠던 잔카는 감히 볼멘소리도 못내고 얌전히 고개를 주억였었다.
그날.
냉랭한 표정과 달리 자상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은 크고 따듯했음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어서 다시 만나고 싶다.
보고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오늘은 꼭 이 섬에 들러 얼굴이라도 비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인사라도.
그 동안의 안부라도.
바깥 세상의 이야기라도.
이곳은 6대 금역禁域 중 사금섬이라 불리우는 방사능 피폭 위험지대.
그리고 동시에, 종갓집으로서 대를 이어가는 니지쿠가문의 셋째자녀 사위 앞으로 지급된 유산(토지),
사금賜金의 땅.
해변에 멈춰선 잔카를 향해 달려오던 파도는 어느순간 맥없이 꼬구라지더니 하얗게 부서져 발목 언저리를 찰랑였다.
마치 지난 날들이 전부 파란만장波瀾萬丈이었던 것 처럼.
지금의 이 안식처가 여전히 감개무량感慨無量한 것 처럼.
잔카의 눈이 깊고 푸르게 아득해지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다.
“여긴 오존이 적으니까 나무 밑에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응 잔카.
하루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
정오가 되자 어느새 잔카의 뒤로 소리없이 다가온 엔진의 이정표가 머리 위로 펼쳐졌다. 놀란 잔카의 비명소리와 목소리와 남자의 웃음소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갈매기의 우는 소리.
아, 좋다.
나의 쉴 곳과,
나의 귀여운 잔카와,
나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
다 잃고 다 빼앗겼어도 여기 이 곳에.
너만 있으면.
그 곳이 곧 내 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