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없는 곳에서 죽을 생각 마십시오. S급의 기억력은 수 년 전의 목소리조차 생생하게 재연해냈다. 분수에 맞지 않게 건방지고 대범한 말을 지껄이던 상대방의 모습을 성현제는 방금 전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껏 겪어온 모든 인간, 모든 순간, 모든 공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흥미 위주로 굴러가는 지겹고도 지겨운 삶이다보니 웬만한 자극이 아니고서야 뇌속에 자리 잡기 힘들었다. 일부러 애써서 무언가를 기억하려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성현제가 이토록 누군가에 대해 자세하다못해 실감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성현제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중요하고 말고. 송태원이지 않은가. 이 길고 힘겨운 여행길에서 성현제를 잠깐이나마 웃게 만드는 그를, 기억에만 의존해 만난지 몇 해나 흘렀던가.
뭐가 그리 즐거우냐.
어린 혼돈의 목소리에는 얼핏 안쓰러움이 묻어있기도 했다. 그래도 성현제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가는 감각 따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 세계의 진 주인공 덕분에 초승달의 권속에서 벗어난 고로 이제는 죽는다면 돌이킬 수 없다. 치유 스킬은 만능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걸레짝이 된 몸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고르는 이 순간에도 성현제는 송태원을 생각했다. 스멀스멀 피어올라 상대에게 스며드는 검은 그림자처럼 아주 잠깐의 틈도 봐주지 않고 침투해 정신을 장악했다. 단순하고 원색적인 지난날의 즐거움. 떠올리는 건 이처럼 쉬운데 돌아가는 건 왜 이리 어려운지. 성현제는 그 언젠가, 송태원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들었다. 그새 결혼이라도 했으면 어쩌지 ...역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근사한 턱시도를 입고 버진로드를 걷는 송태원, 그 옆엔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현제 자신이 있었음 했다. 아아, 보고싶어. 자신이 조금만 더 별볼일없는 인간이었다면 진즉에 포기하고 돌아갔을텐데. 그런 생각이나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린 혼돈이 앞장서 움직였다.
가자.
다시 세계를 넘나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