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다닐 이가 이렇게 허름한 옷을 입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네"
하, 왜 또 아침부터 지랄이실까. 아담은 부인이 만들어준 수프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루시퍼와 함께한 지 고작 일주일. 아담은 루시퍼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루시퍼 모닝스타는 결코 함께 살기에 적합한 인간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뒤죽박죽에, 물건은 아무 곳에나 두는 데다 사람을 어쩜 노예처럼 부려 먹는지, 아담은 자신이 조수로 계약한 게 아니라 노예로 팔려 온 건 아닌지 잠깐 고민했다.
빨리 먹으라 재촉하는 루시퍼에 아담이 수프를 허겁지겁 먹었다. 탑햇을 쓰고 프록코트를 입은 루시퍼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며 아담을 재촉했다. 접시를 들고 마신 아담에 루시퍼가 혀를 찼다. 가르칠 것이 많겠구만. 낡은 플랫 캡을 눌러 쓰며 달려 나온 그가 루시퍼의 뒤에 섰다.
루시퍼는 아담을 고급 양복점에 데려갔다. 자신이 오리라 상상도 못했던 곳을 - 아담이 빈약한 상상력으로 그린 부르주아인 자신은 따뜻한 집에서 삼시세끼 고기요리를 먹고 있는 것이었다. 다양한 고기요리를 상상하느라 양복점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보자 그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루시퍼가 그런 그의 등을 지팡이로 가볍게 쳐 펴주었다.
"이제 익숙해지게. 아담."
"모닝스타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경께 어울리는 원단이 있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 요새 내가 많이 바빴네. 그래, 자넨 잘 지냈나"
"경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일행과 함께 여기로 오시지요."
화목한 광경에서 제외되는 건 아담 혼자다. 아담은 괜히 낡은 색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추위를 막느라 목에 두른 천이 답답했다. 재단사와 담소를 나누던 루시퍼가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아담이 눈치를 보며 소파에 걸쳐 앉았다. 재단사가 줄자를 들고 오자 아담이 황급하게 일어섰다.
줄자를 든 손이 아담의 몸 여기저기를 쟀다. 루시퍼는 어느새 제공된 차를 마시며 그를 보고 있었다.
"점잖아 보이게 검은색이 좋겠군. 자네 솜씨를 믿겠어."
"과찬이십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련의 과정에 아담은 불쾌함을 느꼈다.
생활습관이 엉망인 이 양반이 사실 명망 높은 귀족이란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며 아담은 입술을 짓씹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그 방도, 하나하나 가치를 따지면 귀중했으니, 그 중 하나를 가져다 팔면 이스트엔드 거리 하나가 일주일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열등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재단사가 우아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폈다. 목을 가다듬은 그가 입을 열었다.
"모닝스타 경, 잠시 참견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근본은 티가 나는 법이랍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담은 가슴이 부글거렸다. 그러나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돈다발을 내밀어도 자부심 높은 재단사가 그를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은 까닭이다. 루시퍼가 벗어놓은 코트를 입고 탑햇을 썼다.
"되었네. 아무리 솜씨 좋다하더라도, 누가 말많은 이를 찾아오겠나"
루시퍼가 아담에게 손짓했다. 어느새 코트를 입은 아담이 루시퍼의 옆에 왔다. 표정이 굳은 재단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경. 다음에도 또 찾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도자기 인형같은 무기질적인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재단사가 시선을 피했다. 잘 있게나.
***
"기성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네."
부인이 특별히 솜씨를 부려 만든 푸아그라 파테를 먹는 아담에게 루시퍼가 말했다. 무도회장에서 제공될 듯한 그 음식은 아담의 입맛에 딱이었다. 허겁지겁 먹던 아담이 루시퍼를 의식하고 헛기침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는 오늘 사주신 옷이 마음에 듭니다."
"하핫, 함께 준 예법서도 꼭 읽게나. 잘먹으니 보기 좋군. 여기 송어도 먹게나."
루시퍼가 접시를 아담 쪽으로 밀었다. 아담이 다시 포크를 들었다. 레몬을 뿌린 송어는 겨울에 잡혔음에도 정말 맛있었다. 양복을 사며 불쾌했던 기분이 풀리긴 했지만, 더 기분이 좋아졌다. 루시퍼가 피식 웃었다. 단순하긴.
"소스가 묻었네,"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는 루시퍼에 아담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생각했다. 루시퍼와 생각보다 지낼만했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배울 점이 아주 많았고. 1년만 버티고 사라지자 아니다. 기왕 이렇게 기회를 잡게 된 거 어떻게든 이용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
늦은 겨울, 어느 쌀쌀한 오후였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담이 어두운 거실에 한숨을 쉬었다. 이 어둠 속에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루시퍼가 있을 것이다. 아담은 익숙하게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줄이 풀린 바이올린을 마호가니 탁자에 올려두던 아담이 종이 더미에 미끄러질 뻔했다. 허리를 잠시 두들기던 그는 곧 지저분하게 펼쳐진 종이를 정리했다. 아담이 루시퍼 근처에 떨어진 파이프며, 사과 지팡이를 정리하기 위해 소파에 다가갔다.
언제나 빛나던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어둠에 잡아먹힌 샛별에 아담이 혀를 찼다.
"루시퍼."
그럴 줄 알았다. 그냥 이름을 불러도 평소처럼 무례하다는 지적조차 없었다. 이런 상태의 루시퍼는 바깥 자극에 둔해져 극단적으로 반응이 없었다. 과묵한 부인에 따르면 그가 일정한 시기로 가라앉는다 했다. 연구를 하다 클럽에서 제명되고 나서부터라는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완벽한 인간을 만들고 싶다 말할 정도면 그곳에서도 어떻게 굴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아담이 소파 밑에 굴러들어간 파이프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서늘한 손이 튀어나와 그를 잡아당겼다. 갑자기 잡아당겨진 스카프가 목을 졸랐다.
"컥, 무, 슨, 케흑, 일인데."
그는 루시퍼를 달래듯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꽉 잡힌 스카프가 풀리고 소파 위로 강하게 잡아당겨졌다. 아담이 그에게 화를 내기도 전, 날카로운 치아가 목울대를 물었다. 콰득, 살갗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목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담이 그를 밀어내려 한 시도는 루시퍼에게 잡힌 양손이 소파에 내리꽂히는 것으로 끝났다.
목에 남은 상처를 혀로 핥고 떠나는 루시퍼의 입가가 붉었다. 어둠 속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아담을 보았다. 그 시선을 피해 아담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굴러떨어졌다. 아담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겁먹은게 맞다 하지만 누구나 제 목을 물어뜯는 미친 놈에게 겁을 먹지 않을리가 없잖은가
아담은 루시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앉은 채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문가에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달려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아담의 한손은 피가 흐르는 목을 지혈하고, 한손은 루시퍼를 향해 펼쳐져 있었다.
루시퍼가 한발짝 다가올 때마다 몸을 크게 움찔거리던 아담은 결국, 그 분위기에 못이겨 네발로 기어서라도 나가려 했다. 잠깐의 틈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 목덜미가 잡혀 바닥에 처박힌다.
"커억, 사, 살려줘."
아담이 발버둥쳤다. 작은 체구에 비해 강한 힘이 그를 짓눌렀다. 피가 여즉 흐르는 목을 루시퍼가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고통에 아담의 몸이 튀었다. 유난히 차가운 손가락이 바지춤을 파고 들어왔다.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목을 짓씹은 것도 모자라, 지금 건장한 사내를 깔아뭉개려 하고 있었다. 눈이 완전히 돌았는데. 아담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가 몸을 움직일수록 입고 있던 옷이 벗겨졌다(). 루시퍼가 힘을 주어 반쯤 벗겨진 옷을 찢었다. 아담이 넝마가 된 옷을 동아줄인 것 마냥 붙잡았다.
***
"아담."
"우, 에"
여운에 잠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담이 힘겹게 눈을 떴다. 무표정한 미인이 보인다.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그 무기질적 표정 차라리 항상 미소를 띄고 있는 도자기 인형이 더 생기발랄해 보일 지경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벌어진 입에서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저런, 흘렸잖니."
옷조각으로 입가를 닦아 준 루시퍼가 다정하게 웃었다.
제 밑에서 바르작거리는 몸을 보던 이가 몸을 숙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어느새 피가 멎은 목에 닿았다. 바이올린 줄을 조율하듯 섬세하게 만지던 손가락이 일순 힘을 줬다. 숨이 막힌다. 아담이 목을 짓누르는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긁어댔다. 뭉툭한 손끝이 섬섬옥수에 붉은 자국을 내다 힘없이 떨어진다. 점점 파랗게 질려가다 하얗게 변한 얼굴을 즐겁게 관찰하며 루시퍼가 달큰하게 미소지었다. 끝내 기절한 아담 위에 루시퍼가 엎어졌다. 희미한 고동소리가 안정감을 줬다.
아담은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피를 끊임없이 흘린데다 차가운 바닥에서 루시퍼를 받아낸 탓이었다. 다른 이였으면 진작 주님 곁에 가고도 남았다는 의사의 말에 루시퍼가 드물게 반성했다. 모처럼 받아들인 조수다. 아껴줘야겠지 않겠는가 기실 그와 함께 있다보면 완벽한 인간에 대한 욕구는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루시퍼, 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완벽한 인간을 만들고자 한 욕구는 외로움과 우울에서 기인된 것이라. 아담과 지낸 한달은 그런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었다. 특히 그날의 아담은 홍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루시퍼는 제가 낸 자국으로 뒤덮인 아담을 보며 저열한 만족감에 젖었다. 아담이 일어나면 이제 잘해줘야겠군.
겨우 병상에서 일어난 아담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루시퍼를 욕했다. 루시퍼가 드물게 눈치를 보며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았다면 완치가 되자마자 짐을 싸서 나갈 작정이었다.
아담의 발목을 잡은 계약서 조항은 이랬다. : 1년을 채우지 않을 시, 위약금으로 보수의 2배를 물어낼 것.
"2배 2배라고"
아픔을 잊고 책상을 내리친 아담은 둔부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신음을 내며 책상에 쓰러졌다.
"그럼, 최대한 보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나는 알아서 들어올테니, 댁은 뭐, 알아서 하라고."
아담이 예의와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무례하게 말했다. 루시퍼는 말없이 계약서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이런 젠장 상스러운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가 짚어준 부분을 읽어낸 아담이 머리를 감쌌다.
"그러니까, 댁이랑 나랑 일정시간 이상 붙어다녀야 하고, 망할, 그게 아니면 또 위약금을 물어내야한다고 순 사기꾼 새끼 아니야. 이거 무효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화를 내던 아담이 제 분에 못이겨 씩씩댔다. 그런그에게 루시퍼 서명이 있는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자네가 서명을 했으니, 무효는 아닐세. 사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계약서는 확실하게 읽어봐야 하지 않나"
" ···하"
뻔뻔한 말에 아담이 말을 잃었다. 읽지도 못하게 서명하라 강요한 이가 누군데, 이렇게나 뻔뻔할 수가 루시퍼가 상자를 내밀었다.
***
옷을 고르러 갈 때도 느꼈지만, 루시퍼는 아담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 몸을 겹친 그날 이후로 루시퍼는 아담이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 마냥 굴었다. 그날 이후로 몇번 몸을 겹치긴 했다. x발, 자괴감이 들었지만 의외로 속궁합은 괜찮은 편이었다. 아담은 자신이 이렇게도 쾌락에 약했나 고민했다.
몸을 겹치고 나면 아담은 제 십자가를 쥔채 신께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런 아담을 루시퍼는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