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신호차가운 금속 냄새가 났다. 기계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격납고에 묶인 AC 오라클은 거대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에반제는 오라클의 발치 옆에 기대 앉아 있었다. 대충 내팽겨진 채 구겨진 파일럿 슈트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땀이 식어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움이 뼈를 적셨다. 심장은 여전히 뜨거웠다. 아직도 전투의 잔상이 망막을 파고들었다. 쏘아지는 미사일의 불꽃. 파열되는 장갑. 폭발하는 불길. 모든 것이 선명했다. 승리했다. 이겼다. 그러나 가슴 한켠이 텅 비어 있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목을 옥죄었다. 자신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너무 거칠었다. 너무 날카로웠다. 마치 스스로를 베어내는 칼날 같았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잭이었다.
그의 실루엣이 격납고의 불빛에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그의 눈동자는 마른 우물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담겨 있었다.
말은 없었다. 둘 사이로 어둠이 흘렀다. 멀리서 정비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들의 소음이 뼈를 울렸다.
"제법이네."
잭의 목소리가 공기를 잘랐다. 차가웠다. 날카로웠다.
에반제는 웃음을 흘렸다. 쓰디쓴 웃음이었다. 입 안 가득 쓴맛이 번졌다.
"구경이라도 하고 있었나"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대답은 없었다. 침묵이 길었다. 격납고의 그림자가 그들을 삼켰다가 뱉었다. 형광등 불빛이 깜박였다. 순간 잭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가 떠올랐다.
"감정적이야. 네 움직임."
잭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맑았다. 그 말이 에반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졌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분노일까, 수치심일까.
"이긴 건 이긴 거 아냐"
목소리가 떨렸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승패가 전부는 아니지."
잭의 말은 차가웠다. 지하 도시를 늘 떠도는 바람 같았다.
"그렇게 싸우다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의 말에 담긴 진실이 가슴을 옥죄었다. 에반제의 손바닥에 붉은 자국이 패었다.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터뜨리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잭은 천천히 검은 오라클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투의 상처가 아직 선명했다. 늘어진 전선. 긁힌 장갑. 그을린 자국들. 모든 것이 그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침묵이 길었다. 너무 길었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내 상대가 될 만해졌군."
에반제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이 멎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인정이라는 작은 불씨 같은 것이. 그것은 미미했지만 확실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인정해 주는 건가"
속삭임처럼 나왔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깨달았다.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지."
잭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온기가 스쳤다. 아주 잠깐. 아주 미미하게.
잭은 돌아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에반제는 그 소리를 온몸으로 들었다. 금속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기쁨일까, 분노일까. 알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마치 폭풍의 눈에 갇힌 것처럼. 다만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은 아마도 성장이라는 이름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혹은 인정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격납고의 불빛이 깜박였다. 오라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에반제는 고개를 들어 오라클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기계의 눈이 붉게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