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토독, 토독, 새벽부터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지문 너머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레이겐은 부스스 깨서 이부자리에서 몸을 누이며 뒤척였다. 제 머리맡에 놓인 아날로그 시계가 오전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해가 뜰 시간인데도 거뭇거뭇 날이 어두웠다. 그는 하품을 길게 하고서는 문득 깨달았다. 매일 새벽마다 귀찮게 깨우러 오던 시게오가 오늘은 없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에 그는 이부자리를 개고서는 다다미 문을 열었다.
"모브"
카게야마의 신사가 있는 고저택은 늘 조용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조용했다. 절간에 온 것 처럼 비 내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는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서는 시게오가 쓰는 방 문을 열었다. 그 애의 이부자리는 곱게 개켜진 채였다. 부엌으로 가자 명주천으로 만든 덮개를 씌운 소반이 있었다. 그걸 열자 정성스럽게 만든 오니기리와 함께 쪽지가 두 개 놓여있었다. 이틀동안 사이타마 현에 입원해 있는 리츠 도련님을 뵈러 시게오 도련님이랑 다녀올거예요. 냉장고에 된장국이랑 옥수수 삶아뒀으니까 나중에 드세요. 레이겐은 다른 쪽지를 넘겨서 보았다. 반쇼 부인이 쓴 것 보다 약간 더 두툼한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히라가나로 적힌 짧은 문장이 있었다.
다녀올게요.
레이겐이 사다 준 스케치북에다 색연필로 시게오가 쓴 글이다.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고저택은 조용하다 못해 으스스하다. 레이겐은 오니기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제 방으로 돌아와서 탁자옆에 올려두고서는 그것을 우물우물 베어 물며 멍하게 영어 단어장을 훑어봤다. 영어 공부가 질리면 물리 책을 꺼내서 풀었고, 그것도 질리면 문학 참고서를 꺼낸다. 정신을 차려보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비가 내리면서 바깥 날씨가 계속해서 흐린지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매번 귀찮게 굴던 꼬마가 없던 탓이다. 붙어있을 때는 뜨끈하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귀찮았는데 막상 없다고 생각하니 내심 섭섭했다.
냉장고에서 차게 식은 옥수수를 꺼내 오물오물 먹으며 공부를 하는데, 어디선가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은 옥수수를 입에 문 채 문을 열었다. 고저택의 작은 정원에 피어난 나팔꽃에 빗물이 잔뜩 고여서 흘러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레이겐 군, 거기 진짜 요괴 나온다면서. 문득 전학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 초능력이 실존한다는 사실도 알았는데, 요괴가 없을리는 없지 않은가. 레이겐은 우산을 챙긴 뒤 슬리퍼를 끌고서는 저택 옆의 신사에 고개를 내밀었다.
비 내리는 신사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고보니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한다고 신사 안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은 결혼식을 할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았다.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는 신사의 신당 안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에 뒤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귓가에 바람이 훅 불었다.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따뜻한 파란 빛이 녹색빛과 함께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빛이 누구의 것인지 안다. 레이겐은 손바닥으로 오로라처럼 일렁거리는 빛을 만지작거리며 그 애를 떠올렸다.
쓸쓸한 하루를 보내고 비 내리는 바깥 여름 풍경을 보며 점심을 먹은 뒤, 간단하게 청소를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쇼 부부와 함께 돌아온 시게오를 향해 너무 반가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 레이겐은 애썼다. 시게오가 뛰어오더니 레이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는 꽉 끌어안았다. 리츠를 보고 왔어요. 엄마가 그랬는데 조금 있으면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대요. 리츠는 진짜 귀여워요. 제가 그린 그림도 줬어요. 시게오는 레이겐의 무릎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밥알을 씹는데 문득 무릎에서 밥을 오물거리던 시게오가 레이겐을 올려다보고는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 없었어요"
"...없었는데."
이상하다. 에쿠보가 스승님이랑 놀았다고 그랬는데. 그 애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다 말았다. 레이겐은 순간 등 뒤로 오소소 돋는 감각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시게오에게 물었다.
"에쿠보가 뭔데"
"제 친구요."
레이겐은 더 이상 시게오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날 밤 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비가 퍼붓고 나더니 햇볕이 쨍쨍한 날이 이어진다. 나가노 현 인근 마을에서 마츠리가 열리는 것과 함께 신사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축제기간에 돌입하면서 카게야마의 본당이 있는 신사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축제 기간을 맞이해서 시게오는 공부하는 레이겐의 옆에 앉아서 삐뚤삐뚤한 솜씨로 고헤이를 접었다. 그걸 접어서 소쿠리에 모아서 신사를 관리하는 신관과 무녀에게 가져다 주면 그들은 그것을 엮어서 수호목에 걸어둔 낡은 고헤이를 내리고 그것을 새로 달았다. 축제라면 좀 더 준비하지 않나 먹을거라던가. 소년은 반쇼 영감에게 물어봤으나 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런거 안해, 잡귀만 꼬이고. 레이겐은 비가 오던 날 자기가 봤던 잡귀인지 귀신인지 뭔지를 떠올리다가 이내 관두었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잘 모르는 편이 좀 더 좋다.
카게야마의 본당에서 살아있는 신의 알현은 7일동안 이루어졌다. 시게오는 간단하게 자기를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붙은 불길한 것을 제령 해 주거나, 점을 봐 주었다. 대부분의 점은 아주 근시의 예지거나 아니면 아주 미래의 예지여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갔으나 나이 든 사람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가끔 그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이 집에 돌아가면서 레이겐을 마주치면 그에게 간간히 묻고는 했다. 학생, 이 집에서 초능력 수련을 하고 있다면서. 레이겐은 처음에는 그런게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결국에는 귀찮아서 그냥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토메라는 동급생이 그렇게 추측한 건 이미 그런 소문이 나가노 현의 인근 마을에 쫙 퍼져서 그런 걸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를 진짜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따로 있었다.
어린 신께서 이번에 인간과 결혼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신부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하도 그 질문을 들어서 노이로제가 생길 때 쯤, 카게야마의 어르신이 레이겐에게 말했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신부복을 입은 뒤 시게오와 함께 공물을 바치면서 기도를 해야 한다나. 그 날에는 많은 주민들이 저택의 작은 신사에 몰린다는 반쇼 부인의 말을 듣고서는 레이겐은 생각했다.
도망가자. 어차피 신부가 없어서 아쉬운건 저쪽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도망가야겠다.
레이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작은 가방을 꾸렸다. 가방에 지갑과 옷을 접어 넣은 뒤 새 건전지를 갈아끼운 MP3를 챙기는데 다다미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도망가는게 들켰나 싶어 내심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문을 열고 타박타박 들어오는 어린 신랑이 있었다. 평소 이시간 쯤이면 공부를 하던 레이겐의 모습 대신 짐을 싸는 가방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본 시게오가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변명을 생각하며 눈을 굴리는데, 펼쳐놓은 참고서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수족관에서 대화를 하는 영어 지문을 본 레이겐이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
"내일 수족관 가려고."
"그치만 내일은 저랑 같이 신사에서 기도 하셔야 되는데. 근데 수족관이 뭐예요"
"물고기가 있는 곳."
"물고기 먹으러요"
레이겐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다 물었다.
"수족관 가본 적 없어"
시게오가 순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른 곳에 가 본 적은 없어 시게오는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리츠가 있는 병원이랑, 여기 말고는 가본 적 없어요. 그 말에 레이겐은 한숨을 쉬고서는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동 학대야. 경찰이나 복지부에 신고를 해야 한다고 그는 기왕 도망치는 김에 시게오도 데리고 잠깐 도망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돌아올거니까 도망이라기 보다는 허락 없는 외출, 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날 새벽 5시에 옷을 갈아입은 뒤 가방을 매고서는 시게오의 방으로 가자, 시게오는 아직 자고 있었다. 레이겐은 잠든 아이를 깨우려다가 괜히 저택이 소란스러워질까, 신발장에서 전에 사 준 곰돌이 운동화를 챙긴 뒤 유카타를 입은 아이를 가볍게 안아들고는 해도 뜨지 않은 산길을 나섰다. 아이를 안아들고 버스 정류장 까지 걸어가면서 이게 잘하는 짓인가, 잠깐 고민은 있었지만 기왕 저질렀으니 진짜 수족관으로 아이를 데려가 보기로 했다.
촌구석에서 산다는 건 맨날 마주치는 사람을 만난다는 뜻이다. 평소에 타지 않는 첫차 버스에 타자, 늘 그를 학교에 태워다 주던 버스기사가 작게 고개를 갸우뚱 하며 레이겐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 품에 있는 건 동생이야 레이겐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다고 말하고서는 버스 요금을 낸 뒤에 버스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참 버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레이겐은 제 품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시게오의 발에 곰돌이 운동화를 신겨주었다. 그는 평소에 내리던 상점가가 있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서, 자신이 처음에 타고 왔던 간이역이 있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 쯤 되자 해가 떠올라서 주변이 환했다. 매표소에는 막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나이 든 중년 여성이 앉아있었다. 시게오의 손을 잡은 채 기차 노선표를 보던 레이겐은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수족관은 어느 역으로 가야 하나요"
여름방학 숙제 때문에요. 레이겐은 황급하게 그 말도 덧붙였다. 직원은 여름방학 숙제라는 말에 아, 알겠다는 듯 소리를 내고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내 목적지에 가는 청소년 표 한장을 끊은 그들은 기차를 타고 수족관으로 향했다. 출발하는 기차에 앉은 시게오가 창 밖을 맹한 얼굴로 바라보다 레이겐을 보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저 기차 처음 타봐요. 그리고 그 애는 유리창에 제 작고 오똑한 코를 아예 가져다 붙이고서는 가는 내내 정신없이 바깥풍경을 계속해서 내다보았다. 기차표를 검사하던 승무원이 레이겐에게 물었다. 옆에 있는건 네 동생이니 이제는 꽤 익숙한 질문이었음으로 레이겐은 뻔뻔하게 그렇다고 대꾸하고서는 여름방학 숙제 때문에 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동안 매일 아이가 집에서 유카타를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유카타를 입은 시게오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 레이겐은 기차역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옷부터 사서 입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카게야마 본가에서 받은 용돈은 넘치도록 많았음으로 옷 한벌 정도는 넉넉히 사서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가노 현에서 가장 가까운 수족관은 기차를 타고 40분 정도 간 뒤, 기차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20분 정도 더 가야만 했다. 그들이 내린 기차역은 레이겐이 전에 살던 도시보다는 확실히 작았지만 카게야마 본가가 있는 간이역 보다 조금 더 컸다. 유동인구가 조금 있는 그 곳의 기차역 근처에는 현대식 상점가도 늘어서 있다. 그 중 아동복을 판매하는 가게에 들어간 레이겐은 3살 아이가 입을 만한 반바지와 티셔츠를 샀다. 스스로 유카타를 입을 줄 아는 3살 아이인 시게오는 놀랍게도 현대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레이겐이 쥐여주는 옷들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멀뚱멀뚱 레이겐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레이겐은 가게의 탈의실에 함께 들어가 그것들을 직접 입혀줘야만 했다. 버스를 타고 수족관으로 가는 동안 시게오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 티셔츠와 반바지가 어색한지 그것의 옷깃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그 옷이 유카타보다 더 편하지 않아"
"모르겠어요."
그래도 스승님이 입혀 준 거라서 마음에 들어요. 시게오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고, 레이겐은 수족관 앞의 기념품 가게에서 고래상어 자수가 놓아진 야구캡 모자를 사서 아이에게 씌워주었다. 아동용 사이즈는 하나밖에 없어서, 시게오의 머리에는 그것이 조금 컸다. 모자까지 쓴 시게오는 어떤 촌구석에서 살아있는 신이랍시고 추앙받는 존재가 아닌 완벽하게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바다를 남향으로 지어진 수족관 안으로 들어서는데 여름방학으로 생태 관찰 일지를 쓰기 위해 부모와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보였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손을 잡고서는 수족관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한 건물 안의 옅은 푸른 조명 사이로 현란하게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모습에 시게오는 온 마음을 빼앗긴 듯 그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이겐은 혹시나 아이를 잃어버릴까봐, 시게오의 손을 꼭 잡고서는 말했다. 절대 내 손을 놓아도 안되고, 내 옆에서 멀어져서도 안된다고. 저번에 멋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서 미아가 될 뻔한 뒤 잔뜩 혼난 기억이 있어서인지 시게오는 몇번이고 맹한 얼굴을 끄덕거리다 이내 웃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수족관 안에서 사육되는 동물 중에는 펭귄도 있었다. 시게오는 태어나서 난생 처음 보는 펭귄을 보고서는 레이겐에게 가리켰다. 스승님, 저건 뭐예요 저건 로열 펭귄이라고 하는거다. 레이겐은 옆에 있는 간판 설명을 곁눈질 해가며 시게오에게 아는 척 설명해 주었다. 시게오가 한자와 히라가나를 아직 다 읽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레이겐이 뭐든지 대답하자 시게오는 눈에 들어오는 동물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죄다 물어보았다. 스승님, 저건 뭐예요 그건 클라운 피쉬라고 하는거야. 그럼 저 물고기는요 저건 톱 가오리. 그럼 저거는요 이건 물고기가 아니고 보름달 해파리라고 하는거다, 모브여. 해파리는 바다에서 저렇게 둥둥 떠다니는 생물이지. 그건 에쿠보랑 비슷하네요. 시게오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스승님은 굉장해. 모르는 게 없네요. 사실 수족관 같은건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소년을 바라보자, 레이겐은 즐거운 마음으로 같이 관람을 마쳤다.
수족관 옆에는 수족관에서 운영하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야외 카페테리아는 바다를 향해 탁 트여있다. 에어컨 바람은 없지만 바깥 풍경이 좋아, 그들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수족관의 마스코트인 고래상어 무늬가 오무라이스의 계란 위에 찍혀있는걸 본 시게오가 짧게 눈을 깜빡였다. 티셔츠와 반바지에도 익숙해진듯 시게오는 가만히 앉아서 레이겐이 먹여주는 오무라이스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레이겐은 샌드위치와 콜라를 먹으며 시게오가 먹고 남긴 오무라이스를 마저 먹어치웠다. 입에 묻은 케챱을 휴지로 닦아주면서 레이겐은 아이가 참 손이 많이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한낮의 태양을 야외 테라스의 파라솔 아래에서 피해 앉아서 그들은 후식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시게오는 우유 소프트 아이스크림, 레이겐은 딸기와 초코가 섞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멍하게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오늘 신사의 축제나 그 애의 출신 같은건 전혀 딴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한참 아이스크림을 핥는데 열중하던 시게오가 말했다.
"저게 뭐예요"
아이의 작고 짧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수족관 옆에 있는 관람차다. 레이겐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대충 말했다. 저건 관람차라고 하는거야. 관람차가 뭔데요 타고 빙글빙글 도는거. 타보고 싶어요. 그 말에 시게오를 바라보니 다 먹은 아이스크림 콘을 쥐고서는 레이겐을 유순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자 레이겐이 사서 씌워준 모자 아래로 시게오의 새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결국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관람차를 타보기로 했다. 관람차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낡고 삐걱거리는 관람차의 의자에 시게오를 앉히고 몇가지 주의사항을 들은 뒤 반대편 의자에 앉자, 직원이 문을 닫아주었다. 한여름의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관람차가 삐걱거리며 천천히 위로 떠오른다. 별 재미도 없고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애는 관람차를 타는게 오늘이 처음이다. 아니, 관람차 뿐만이 아니다. 기차를 탄 것도, 이런 낯선 곳에 부모 없이 단 둘이 온 것도, 캐릭터 티셔츠 옷을 입은것도, 모두 처음이다. 시게오가 유리창에 얼굴을 딱 붙이듯 뚫어져라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걸 본 레이겐이 말했다.
"모브, 그러다 떨어질라."
그 말에 시게오가 레이겐을 돌아보고서는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하늘을 날아도 될까요"
태어날 때 부터 초능력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초능력이 자기의 손가락을 움직이는것과 비슷한걸까. 레이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왼손을 꼼지락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하긴 오늘 관람차를 타러 오지 않았더라면 시게오는 카게야마 본가에 있는 신사에 앉아서 늙은이들이나 손님들의 어깨에 붙은 잡령이나 제령해주고 무슨 기도나 올리고 있었겠지. 그 애에게 제령은 숨쉬는 것보다 쉬웠고, 물건을 띄우는 건 걷는 것과 똑같다.
"뭐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위험하니까 얌전히 앉아서 봐."
혹시 높은곳이 무섭다면 내 옆에 있어도 되고. 그 말에 한참 멀뚱멀뚱 레이겐을 바라보던 시게오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레이겐의 무릎팍에 앉았다. 귀신도 안 무서워 하는 애가 높은 곳은 무서워 하나 레이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게오를 안은 채 바깥의 푸른 바다와 지평선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관람차 안은 냉방이 되지않고 바람도 통하지 않아서 조금 덥고 답답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니 체온 때문에 더 그랬다. 그래도 별로 그 애를 품에서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관람차를 타고 난 뒤, 그들은 수족관 앞에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게오는 모래사장에 주저 앉은 채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놀았고, 레이겐은 계속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 가출한 것 때문에 고저택에 돌아가서 혼나면 어떡하나. 그냥 혼자 가출할걸, 왜 괜히 애를 데리고 왔던걸까. 그래도 한번도 수족관에 데려가보지 않은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그리고 목표한 대학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스승님."
한참 바닷가에서 파도가 둥글게 치며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을 바라보던 시게오가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작은 손바닥에는 백화된 하얀 조개껍데기가 놓여있었다.
"이거 선물로 줄게요."
오늘 수족관 데려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게오가 그렇게 말하며 단정하게 웃었다. 아이 같지 않은 미소이면서도 아이같은 미소였다. 그 말 한마디에 근심걱정이 둥글게 치던 물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의 짧은 유흥은 오후에 끝났다.
집에 가기 위해 수족관을 나서는데, 주차장에 익숙한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레이겐은 그 차의 주인을 알고 있다. 반쇼마루 영감이 담배를 피고 있다 그들을 발견하고서는 손을 흔들었다. 레이겐은 그를 몰래 피해서 집에 가려다가 한눈에 자신들을 알아보는 표정에 결국 포기하고서는 그에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호탕하게 웃은 영감이 레이겐의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집에 가야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시골 입소문을 너무 얕보면 안된단다."
게다가 세살 아이가 입은 유카타 차림은 엄청 눈에 띄잖니. 차를 타고 카게야마의 본가에 돌아가면서 영감은 웃으며 수족관을 찾은 경로를 설명해 주었다. 카미카쿠시 쪽으로 고려 해보기도 했지만 시게오 도련님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테고, 도시쪽으로 찾아보던 중 기차역에서 아침 일찍 유카타를 입은 세살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탄 학생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레이겐은 백미러 너머로 비춰지는 그를 힐끔보다가 약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혼 많이 나려나요."
"나는 괜찮은데 집안 어르신들이 좀 화가 많이 났을걸. 그래도 축제가 완전히 끝나기전에 도착해서 마지막 의식만 하면 용서 해 주실거야. 그 전까지 내가 도착해보도록 할테니까 레이겐 군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시게오는 일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는 내내 레이겐의 무릎을 베고서는 잠이 들었다. 시게오 도련님이 좀 불쌍하시긴 하시지. 그래도 그런 능력을 타고 태어나신 이상 어쩔 수 없는거고... 영감은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혀를 찼다.
그들이 카게야마의 본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시 반 쯤이었다. 항상 고즈넉한 고저택에는 축제가 한참 무르익어가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짝거리는 홍등이 대문에서부터 토리이까지 길게 걸려있었다. 레이겐은 제 무릎에서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운뒤 그대로 안아들고서는 고저택으로 돌아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이겐도 시게오도 엄청나게 혼났다. 그래도 시게오를 데리고 멋대로 나간 것에 레이겐은 전혀 후회가 없었다.
여름축제가 끝나가는 것과 동시에 레이겐의 마지막 여름방학도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