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저 멀리 동쪽에서 짭짤한 소금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길게 불었다.
여름이 한참 농익어가기 시작하면서 뜨겁게 달군 모래사장에 발가락을 묻자, 바삭하게 마른 하얀 모래의 따끔따끔한 표면과는 다르게 검은 습기가 있는 아래는 시원했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파라솔 아래에 발을 묻은 채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리는 해수욕장을 바라보았다.
도쿄 근교에 위치한 가마쿠라 해변에는 피서를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저 멀리 푸른 지평선 너머로 짠 바닷물 절반 만큼이나 사람들이 잔뜩 제 몸을 맡기고서는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시게오에게는 일반복이 없었기 때문에, 파라솔 아래에 앉아있는 시게오가 입고 있는 티셔츠는 레이겐 아라타카의 것이다. 키는 반뼘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레이겐의 옷은 의외로 시게오에게 헐렁했다. 시게오는 제가 입은 티셔츠와 품이 넉넉한 반바지 카고바지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저번에 외출 했을 때 옷을 사주겠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돌아온 뒤로 아직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옷을 사주지 못했다. 그래서 교복과 속옷 외의 옷은 모두 레이겐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시게오는 눈을 감고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불어닥치는 습한 바람에서는 소금 냄새와 함께 사람들의 살내음, 그리고, 제 몸에 걸쳐진 옷에서 레이겐 아라타카의 근사한 향기가 났다. 새끼 손가락 끝에 매달린 붉은 실이 작게, 아주 작게, 흔들렸다.
시게오가 도쿄에 위치한 레이겐의 집에서 신세를 진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고집불통의 영감들을 어떻게든 말로 잘 넘겼던 것이지 나가노 현의 친척들과 제 가족들에게서는 더 이상 돌아오라는 독촉은 오지 않는다. 그런 점이 든든하고 좋았다. 태어나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말을 떼기 시작한 무렵부터 단 한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신사였지만, 그 곳을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목적지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어서일까, 그건 아마도 지금 저 멀리서 양 손에 작고 푸른색의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걸어오는 남자라는 그늘 덕분이다.
어찌나 오늘 볕이 센지, 사람이 북적거리는 해변의 거리는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산 것과 죽은 것사이의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사람들의 잔상이 더위로 인해 흐물흐물 흔들렸다. 마치 꿈 같았다. 시게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가노 현에서는 여름 축제로 사람이 몰려들어도 이정도로 많이 몰리지는 않는다. 애초에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니니까. 그에 비해 가나가와 현은 도쿄 근교인지라 사람이 많았다. 시부야도, 메구로도, 어디든지 사람이 많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사람 아닌 것들은 잔뜩 섞여있어서 인파를 볼 때 마다 현기증이 일었다.
여기는 꿈이 아닐까. 사실 시게오는 산자락 촌구석의 낡아빠진 신사의 식은 바닥에 앉아서 졸면서 꿈을 꾸는 것이다. 자신이 14년 전에 놓쳐버린 제 신부의 곁에서 보통의 나날을 보내는 그런 꿈을.
하지만 그런 시게오의 착각을 부셔버리기라도 하듯 레이겐이 제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모브"
레이겐은 시게오가 앉아있는 모래사장의 커다란 파라솔 아래로 허리를 숙여 불쑥 들어온 뒤, 제 손에 들고 있던 푸른 유리병 하나를 그 애의 허여멀건한 뺨에다 가져다댔다. 이곳은 현실이다. 시게오의 창백하고 하얀 뺨에 닿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감촉이 이 곳은 현실이라고 시게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까까지 차가운 냉장고 안에 있었을 유리병 겉 면에는 결로현상으로 인해 물기가 잔뜩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라무네 소다는 아무리 촌구석에서 살아서 맹탕인 시게오도 익히 아는 것이다.
"아, 오늘 해변에 사람 진짜 많네. 괜히 오자고 했나"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레이겐 아라타카는 들뜬 표정이다. 그는 윗 단추가 하나 풀린 품 넓은 셔츠를 팔락거리며 자신이 사온 라무네 소다의 끝을 꾹 누르며 비틀어 열었다. 통, 유리병 가운데에 끼워진 유리구슬이 상쾌한 소리를 내는 것과 함께 달콤하고 톡 튀는 향기가 났다. 그는 단번에 내용물을 절반정도 비워내고서는 파라솔 아래에 깔린 비치타월 위에 제 다리를 쭉 뻗었다. 시게오는 웅크려 앉은 채 레이겐을 따라 병 뚜껑을 꾹 눌렀다. 저 멀리 파도가 높이 촤악, 올라오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꺄 파도 높아 다 젖었어 그런 소리와 함께 제 유리구슬도 아래로 추락한다. 보글거리며 탄산이 올라오는 것을 가볍게 홀짝이자, 입 안에서 별이 튀었다.
"모브 군, 입시 공부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여름방학이잖아. 여름 방학은 잘 즐기고 있어"
해변으로 함께 여행 가는 것, 이건 아마도 레이겐 아라타카 나름대로의 배려이자 사과방법일 것이다. 수족관을 그런식으로 다녀온 뒤에는 공부를 가르쳐주기 위한 필요한 말 이외에 오가는 말은 없었으니까. 시게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저 멀리 파도가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입 안에 머금고 삼킨 소다가 톡톡거리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 제 위장을 간지럽혔다. 신사의 친척들과 절제된 생활 때문인지 단 것은 자주 입에 대지 않았기에 입 안에 남는 단맛이 묘하게 끈적거리고 찝찝했다. 다시 한번 파도가 위로 올려치자, 레이겐은 못참겠다는 듯 남은 라무네 소다를 모래사장에 꽂아둔 뒤 시게오에게 말했다.
"난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수영 좀 하고 와야겠다. 너도 갈래"
그 말에 시게오는 빤히 레이겐을 바라보다 느리게 끄덕거렸다.
"조금만 있다가 곧 갈게요."
"그래 빨리 와라. 너무 햇볕을 피하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고."
그리고 그는 미소를 띈 채 바닷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시게오는 그런 레이겐의 뒤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기억하세요 라무네 소다를 처음 마셨던 건 당신이 저를 데리고 가서 사줬을 때예요. 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는 일은 없었다. 레이겐 아라타카는 기억하고 있을까 비록 4살의 일이지만 카게야마 시게오는 선명하게 그와 함께한 순간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새파랗게 어린 어린애가 가엾기 때문에...
길 거리에 비맞으며 버려진 동물을 충동적으로 주워들고 온 것과, 시게오와 결혼 한 것은 레이겐에게 같다.
크게 다를 바 없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새파란 소다를 삼킨 식도가 아려왔다.
사람들이 놀기 좋게 저 멀리 푸르고 시린 파도가 밀려왔다. 처음 발목을 담그던 레이겐은 조금 더 대담하게 바다 안 쪽으로 들어가본다. 인파에 휩쓸려 바닷물에 제 몸을 담그고서는, 시게오가 있는 파라솔을 향해 제 한 팔을 흔들어본다. 모브, 얼른 와 시원해 파도는 계속해서 철썩 철썩 올려붙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노인도 모두 파도에 제 몸을 맡기고서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레이겐의 옆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파도를 직격으로 맞고서는 비틀거렸다.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레이겐이 민첩하게 여자를 안아들고서는 뭐라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괜찮냐고 물어보는 행동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동물을 충동적으로 주워드는 것, 어린 4살짜리 꼬마와 동정심에 결혼하는 일, 그리고 얕은 물에 빠질뻔한 여자를 구하는 일. 모두 레이겐에게는 같은 행동이다. 셔츠가 흠뻑 젖어서 상체에 달라붙은 젖은 품에, 또래 여자를 안아든 레이겐을 바라본다.
시게오는 자꾸만 새끼 손가락에 꼬여있는 붉은 실이 풀리려고 하는 것을 다시 동여매고서는, 어른만큼 커다랗게 자란 제 손을 뻗어 여자를 안고 있는 레이겐 아라타카의 왼손 새끼 손가락에 꼬여있는 붉은 실을 튼튼하게 동여맸다. 방금 마신 라무네의 거품이 뱃속을 부글거리며 거북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고맙다고 인사 한 뒤 친구들 사이로 돌아간 것을 본 시게오는 파라솔 밖으로 나와, 레이겐 아라타카가 그랬듯 바닷가의 모래사장 위를 뛰어서 바다로 향했다. 발을 내딛을 때 마다 여름 햇볕으로 달궈진 하얀 모래가 따끔따끔했고,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바늘로 찌르는 것 처럼 뜨거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머리속과 바다에서 동시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시게오는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며 천천히 레이겐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레이겐은 바닷물로 흠뻑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빨리 왔으면 좋잖아. 방금 파도, 엄청 좋았는데."
이 곳은 그들이 마지막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는 해변이다. 해안가 끝에 서 있는 새빨간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고, 머리 꼭대기 위에서는 갈매기가 울고 있었다. 허벅지까지만 바닷물에 담그고 있는 시게오를 젖기 싫은 것으로 오인한 레이겐이, 그에게 물을 튀겼다. 시게오는 그것을 가만히 맞고 있다가, 레이겐 아라타카가 그랬던 것 처럼 똑같이 물장구를 튀겼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마도 자신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이겐 아라타카가 제 얼굴을 보고서는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 커다란 파도가 다시 밀려와, 몸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을 한입에 삼켰다. 키가 2미터는 넘는 높은 파도였다. 어차피 수위가 낮아서 잠겨 죽을 일은 없는데도, 레이겐은 파도가 닿는 순간 제 쪽으로 다가와 시게오를 끌어안았다.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시게오는 자신을 끌어안은 채 같이 바닷물에 빠진 레이겐을 뿌연 바닷물 속에서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물이 마구 침범해서 귓 가가 먹먹했다. 아까 라무네를 마실 때 처럼, 보글거리고 뻐끔거리는 거품 소리가 먹먹하게 일었다. 시게오는 물에 잠긴 채 레이겐을 끌어안고서는 말했다.
스승님. 저는 당신의 신랑이예요.
입을 벌리자, 입 안과 폐속에 담겨있던 공기방울이 보글거리며 뿌옇고 탁한 바닷물 사이로 사라졌다. 그들은 곧장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어차피 수위가 나작한 해수욕장이다. 다리로 모래바닥을 버티고 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시게오는 젖어서 제 몸에 들러붙은 티셔츠를 입은 채, 마찬가지로 흠뻑 다 젖은 레이겐을 꼭 끌어안았다. 분명 차가운 바닷물에 담궜음에도 서로 맞닿은 젖은 살갗이 뜨거웠다. 시게오는 반뼘 밖에 차이나지 않는 제 스승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레이겐의 얼굴은 볕을 쬐서 익어있었다. 시게오가 잘 타지 않는다면, 레이겐은 볕을 받으면 검어지는 게 아니라 발갛게 익는 타입인가 보다. 시게오는 그대로 제 고개를 레이겐의 젖은 가슴팍에 묻었다. 귀에 물이 들어갔다 흘러나오면서 귓가가 멍했다. 레이겐은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있잖아 있잖아, 저기 또 큰 파도가 오고 있어. 아빠 여기 모래삽 빠트렸어 타케시마 군 이쪽으로 와 사람들이 저마다 제 인연을 향해 부르는 소리. 그리고 몰려오는 대낮의 시원한 파도소리. 짝 있는 갈매기 우는 소리.... 쏴아, 쏴아, 허리께를 간지럽히는 물거품과 레이겐 아라타카. 이윽고 레이겐은 제 품에 고개를 묻은 시게오의 얼굴을 살펴본 뒤 웃었다.
"괜찮아 많이 놀랬지"
시게오는 고개를 끄덕일지 저어야할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었다. 레이겐은 시게오의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미역줄기를 떼주고서는 몇 번 더 장난스럽게 물장구를 튀겼다. 아까의 기묘한 적막은 오간곳 없이 두 사람은 다시 태연하게 물놀이를 시작했다.
한참 물놀이를 마치고 나오자 온 몸이 나른했다. 대낮의 볕은 아주 약간이지만 기세가 꺾여있었다. 시게오는 파라솔 아래의 비치타올 아래에 제 몸을 뉘였다. 그 옆에 앉은 레이겐이 아까 모래사장에 묻어둔 라무네 병을 꺼냈다. 뜨거운 여름 볕을 받은 음료수는 미지근하다 못해 뜨끈해져 있었다. 탄산도 거의 다 빠져나간지 오래다. 레이겐은 그것을 다 마시고서는 병을 뒤집어 톡톡 두드렸다. 둥그런 유리구슬이 톡, 굴러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레이겐은 그것을 시게오의 젖은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가질래"
시게오는 대답 대신 그것을 꼭 쥐었다.
도쿄 근교에서 출발했음으로 오늘은 1박하지 않고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볍게 공용 샤워실에서 몸을 씻어내고서는 옷을 갈아입었다.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레이겐이 내민 여벌의 옷은 한 낮의 뜨거운 차 안에 계속해서 있었기 때문에 뜨겁고, 바삭바삭했다. 바삭한 면 티에 코를 묻자, 레이겐 아라타카의 냄새가 났다. 시게오는 그것을 계속해서 깊이 맡았다. 덜 마른 새까만 머리카락이 헝크러졌다. 소년과 청년의 기묘한 경계 사이에 서 있던 아이는 조금씩, 한쪽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 보다는 내일이, 몸도 감정도 더 단단해진다. 아랫배에 열기가 몰려 조금 설 것 같았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레이겐이 빈 라무네 병과 잡다한 도구를 들고서는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그 말에 시게오는 레이겐 아라타카를 가만히 쳐다본다. 볕 아래에서 붉어진 그의 얼굴과 목덜미, 방금 씻고 나와 반 쯤 젖은 색소 옅은 머리카락. 시게오는 소다 속에 녹아 든 이산화탄소처럼 부글거리는 열기를 내리누르며 그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