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왕이 사는 성의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커다란 수조가 있다. 나선형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나오는 이 지하실은 사랑하는 딸 찰리마저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당시 그 공간을 만들 때 루시퍼는 들떴었다. 아무래도 비밀공간은 로망이지. 좋아하는 물건으로 가득 찬 그만의 비밀 공간. 만족스럽게 공간을 둘러보던 그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렇지, 수조를 둘까. 먼 옛날 보았던 생명체가 없던 바다가 떠오른다. 커다란 수조에 심해를 재현하자. 루시퍼는 수조를 정성들여 채웠다.
지옥에서 보기 힘든 맑은 물로 가득 채워진 수조 바닥에는 두손으로 심해의 지형을 들어 조심스럽게 놓은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심해의 해류를 재현한 물이 해초를 흔들어댔다.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정도야 뭐 점점 채우면 될 일이었다.
여호와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지구가 물만 가득 찬 공간이었을 때, 루시퍼는 천사들 몰래 지구에 내려온 적이 있었다. 빛이 물러나고 어둠이 완전히 오기 전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 하리라 루시퍼는 그 찬란한 순간을 눈부시게 올려보았다. 루시퍼는 로브 자락을 걷어 조심스럽게 물에 발을 뻗었다. 미적지근한 물이 천사의 발끝에 닿았다. 천사는 물 안으로 느리게 들어갔다.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없는 물로 가득 찬 공간이 그를 반겨준다. 물에 휩싸인 루시퍼는 형용할 수 없는 안락함을 느낀다. 눈이 감긴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아래로, 더 아래로, 이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나서야 태어날 인간은 맨몸으로 갈 수 없는 심해까지 서서히 가라앉는다.
루시퍼는 깊숙하게 들어간 골짜기와 굽이치는 협곡을 본다. 아직 활동을 개시하지 않아 잠잠한 화산의 고동과 끝없이 평탄하게 뻗어나가는 평원을, 그 위를 힘차게 내달리는 해류를 느낀다. 그것을 보며 루시퍼는 천국의 위대한 계획이 성공한 미래를 그렸다. 필시 아름다우리라. 그는 천사들이 최선을 다해 빚어낼 동식물과 그 생물들이 살아갈 자연,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누릴 인간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리라. 양을 이끄는 목자처럼 그렇게.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망했다. 그는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쥐여주고 사랑하는 릴리스와 함께 지옥에 떨어졌다.
***
전멸의 날이 끝났다. 지옥의 승리였다. 정확히는 해즈빈 호텔의 승리. 찰리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루시퍼는 찰리의 성장에 고무되어 호텔을 재건하는 것을 도우면서도 성에 돌아오면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가 천국에 대답을 원한 것은 몇번이었는가. 그래서 대답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돌아온 천국의 연락은 전멸의 날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루시퍼는 찰리처럼 맞서 싸워야 결과를 낼 수 있었냐고 자문해도 그가 할 수 있음에도 결국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 부활해 호텔에 찾아온 아담을 성에 거두며 루시퍼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아담은 매일같이 새로운 사고를 쳐댔다. 그렇지, 인간은 늘 사고를 쳤었지. 루시퍼는 스트레스성 두통이 나은지 만성적인 우울함이 나은지 고민하다 그냥 아담이나 때리기로 했다. 정말 명확한 해결 방법이었다. 아담은 루시퍼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나아졌다고는 해도, 늘 따라다니는 우울은.
루시퍼는 문득 지하실에 있는 수조를 떠올렸다.
루시퍼가 계단을 내려왔다. 강철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둔 루시퍼가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벗어 소파 옆에 두었다. 옷은 벗어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루시퍼가 수족관 위에 섰다. 악마가 천천히 변화했다. 하나로 합쳐진 가늘고 하얀 다리가 백금색 비늘이 돋아난다. 비늘이 하반신을 다 덮자 꼬리 끝에서 흐늘거리는 지느러미가 길게 허공으로 뻗어져 나간다. 엉치께에 그것보다 더 작은 지느러미가, 늑골에 아가미가 돋아난다. 루시퍼는 마지막으로 길게 폐로 호흡하고 이내 머리부터 물 속에 빠졌다. 풍덩. 이내 지하실은 조용해졌다.
"아 이 새끼, 또 어디 간 거냐"
루시퍼를 찾아 성 내를 돌아다니던 아담은 허름한 문을 발견했다. 문을 열자 소름 끼치게 많은 계단이 끝없이 있다. 아담은 직감적으로 루시퍼가 이 끝에 있음을 알았다. 잠시 계단을 보던 아담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천사 돼서 좋은 점이 뭐냐. 바로 이런 거지. 아담은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소름끼치는 자식. 이딴 곳에나 틀어박히고.
지하실에 들어선 아담이 뱀 허물처럼 벗겨져 소파에 내팽개쳐진 루시퍼의 옷을 본다. 뭐야, 이 자식. 지금 알몸이야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던 아담이 눈앞에 놓인 풍경에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천국에서 보았던 바닷속 풍경이다.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해마나 고래같이 다양한 생명들이 사는 곳. 그러나 여긴. 생명이 없다. 가끔 움직이는 해초가 보이지만 글쎄, 그것이 넘치는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아닐 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인어가 있었다. 루시퍼였다. 눈을 감은 그가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생물은 너무 맑은 물에서 살 수 없다고 했던가. 아담은 눈앞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신비가 자연적인 생물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물과 수족관 유리는 구분할 수 없다. 아담은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뱀 같은 눈이 느리게 닫혔다 열린다. 구분이 중요한가. 저 아름 다 운 인 어가 나를 보 는 것이 중요하. 아담은 고개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을 떨쳐냈다. 아담이 날개를 활짝 펴 수족관 위로 올라갔다. 루시퍼도 아담을 보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야 왜 이딴 곳에 처박혀 있냐"
눈이 마주치며 든 공포를 떨치기 위해 더 크게 소리를 치며 아담이 루시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루시퍼가 아담에게 물을 뿌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성대마저 인어처럼 변했는지 제대로 된 웃음소리가 나지 않고 공기가 떨려온다. 물에 흠뻑 젖은 아담이 불평하며 다시 높이 날아오르려 할 때였다. 아담은 굵은 발목을 낚아채 잡아당기는 가느다란 손에 이끌려 수족관에 떨어졌다. 함께 떨어지자, 아담. 깊은 바다로. 루시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담의 몸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신성해 보이는 하얀색 비늘이 아담의 두 다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전등 빛에 비치는 각도에 따라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금빛으로 보이는 비늘이 반짝였다. 날개가 쪼그라들어 등에 문신으로 새겨진다. 벗겨진 로브가 수조 위로 떠올랐다. 루시퍼가 코로 호흡하는 아담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아가미로 호흡을 할 수 있게 유도했다.
***
아담과 함께 루시퍼가 제가 만들어 놓은 수조 안을 유유히 헤엄쳤다. 루시퍼가 옆에서 어설프게 헤엄치는 아담을 이끌었다. 보여줄게 많았다. 그날 봤던 바다는 이것보다 아름다웠지만, 그 풍경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도 괜찮지 않은가. 좀 더 익숙해지면 함께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