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한밤중에 돌아온 카게야마 저택은 소란스러웠다. 버릇없이 뛰어나간 것 치고는 시게오의 엄마가 레이겐을 끼고 도는 통에 다행히 혼나지 않았다. 결국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들은 카게야마의 집안 손님들과 친척, 그리고 몇 무녀들은 퍽 반가운 눈치였다. 결혼식 준비는 일사 천리로 진행이 되어서 다음날 아침에 진행되었다. 레이겐은 새하얀 시로무쿠를 비롯한 여자 신부복을 보고서는 기겁했다. 그는 결혼식을 도와주는 카게야마 집안 어르신에게 물었다. 제가 신부 역할이예요 그 말에 뭘 당연한걸 묻느냐는 듯 시게오 도련님이랑 결혼 할 수 있는걸 영광으로 알라고 어르신이 대꾸했다. 레이겐은 어르신이 뒤돌아본 사이에 기모노 소매 사이로 가운데 손가락을 슬그머니 숨겨서 들고서는 작게 메롱했다.
하얀 기모노를 다 입고 앉아있는데, 시게오가 다다미 문 틈 사이로 서 있었다. 평소 입던 하카마와 비슷했지만 새까만 옷을 입고 둥근 솔이 달린 오비 띠를 매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레이겐이 손짓해도 시게오는 레이겐에게 다가오지 않고 문가를 꼭 붙잡은 채 서서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맨날 교복만 입다가 갑자기 기모노를 입어서 사람을 못알아봤나. 레이겐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게오를 불렀다.
"모브."
그 말을 듣고서야 시게오가 레이겐에게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하카마 바짓자락은 약간 땅에 끌리고 있었다. 시게오는 레이겐을 보며 우물쭈물 하더니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했다.
"부인."
레이겐은 아이의 불명확한 부인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부인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의 호칭에 절로 웃음이 나왔던 탓이다. 레이겐이 웃자 시게오의 새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더니 푸른 빛과 함께 방 안에 있던 책들이 가볍게 붕 떠올랐다. 레이겐의 필체로 적힌 노트가 허공에서 파라락 넘어가고, 작은 책들이 너울거리며 춤을 췄다. 물건들에는 푸른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기현상에 레이겐은 자신도 모르게 서둘러 그 애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네가 한 거야"
아이는 그 질문이 잘 들리지 않는 듯 얼굴을 붉히고서는 레이겐의 하얀 기모노 옷자락을 꽉 쥐었다. 예뻐요. 아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이 혼례가 사기가 아니라는 일종의 증명을 아이의 초능력이 보여준 셈이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초능력이라는게 진짜 있었어.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이 아이를 이용하면 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시한 대학공부 따위보다 훨씬 빛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싶어서 우산을 가지고 폭풍우가 불어닥치는 공터로 뛰어나가던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 레이겐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부인이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어"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어요."
"남자는 부인 할 수 없는데."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진다. 그 말에 시게오의 얼굴의 맹한 얼굴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표정변화가 귀여워서 레이겐은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서는 시게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시게오는 입을 앙 다물다가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레이겐 형이 좋아요. 그러니까 부인 해 주세요. 그 말에 함께 밖에서 둘을 부르는 소리가 났고 방 안을 둥글게 돌아다니던 책은 이내 제 자리에 차분히 내려왔다. 문이 열리더니 신사에서 일하는 무녀와 나이 많은 카게야마 친척이 나오라고 손짓했다. 레이겐은 시게오를 안아들고서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신사로 향했다.
신사에는 초여름에 어울리는 나팔꽃과 작약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카게야마의 친척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신관 옷을 입고서는 이것저것 레이겐에게 시켰다. 비쭈기 나무를 들고 있으라고 하기도 했고, 그들은 서로를 보고 맞절을 했다. 레이겐도 결혼식은 당연히 처음이었음으로 절차를 다 알지 못해서 그냥 시키는대로 서서 했다. 어디선가 전통 악기 부는 소리가 났다. 세살짜리 아기가 뭘 하는지는 아는지, 절을 하는 모습이 귀엽고 우습기도 했고, 아까 방에서 목격한 초능력이 계속 생각이 나서 레이겐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세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다. 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서 태어났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의식을 치루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맴돌고 있어서 레이겐은 의문을 꾹 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레이겐의 부모 되는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서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신사 안을 걱정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절을 마치고 길고 장황한 예식을 읊은 신관이 레이겐에게 둥근 술잔에다 술을 따르라고 했다. 다행히 합혼주로 사용되는 술병에는 술 대신 맑고 깨끗한 물이 담겨있었다. 물을 세번씩 나눠 마시기 전에 레이겐은 제 앞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서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약식이니 뭐니 집안 어른들끼리 싸워대더니, 결국 전통혼례 방식으로 가는 게 착찹했다. 그는 술잔의 물을 머금기 전에 생각했다. 그래, 애 둘 살린다고 생각하고 하는거다. 어차피 법적인 효력은 없댔으니까. 그냥 물을 마시려는데 신관이 말했다. 소매로 입 가리고 마셔라, 신랑에게 보이는 거 아니다. 레이겐은 별걸 다 시킨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리며 길고 하얀 기모노 소매로 술잔을 가리며 마셨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게오가 중얼거렸다. 예뻐요.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뭐냐. 레이겐은 콧웃음치고는 말았다.
신목에 두른 하얀 고헤이를 바라보며, 나무를 세바퀴 돌고 나서야 길다면 긴 혼례가 끝났다. 아침에 시작한 혼례는 오후 쯤에 끝났다. 완전히 진이 빠진 레이겐은 제 머리에 뒤집어 쓴 시로무쿠를 방에 와 벗고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청바지를 입고 다다미 방에 누워있는데 바깥 어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레이겐의 아버지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정략혼도 결혼은 결혼이라고, 그들 나름대로 결혼이 성사된 뒷풀이를 하는지 술을 마시고 웃음소리가 났다. 레이겐은 솔직히 조금 우울했다. 제 인생이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대로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팔에 고개를 묻고서는 엎드려 있는데 다다미 문이 열렸다. 소리에 돌아보니 시게오가 서 있었다. 아까 입은 혼례복 대신 평소에 입는 다른 기모노를 입은 채였다.
"부인."
아이가 귀여운것과는 별개로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레이겐은 시게오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에 자신을 보며 반겨주던 형이 자기를 무시하자 시게오가 안절부절하며 작은 발을 동동 굴리다, 레이겐에게 와서 말했다.
"부인, 제가 강아지 띄우는거 보여드릴까요"
강아지는 띄우면 다리를 버둥거리는게 귀여워요. 시게오는 레이겐에게 조잘거렸다. 강아지를 띄운다고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시게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아지"
"개구리도 띄우면 헤엄 쳐요."
시게오가 긴 기모노 소매에서 작은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미풍이 불더니 저 멀리 연못에서 무언가가 제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둥근 물방울 안에 개구리 한마리가 버둥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벌렸다. 굉장하네... 그는 손을 내밀어 제 방을 부유하며 헤엄치는 개구리의 허여멀건한 배를 간질였다. 연못의 물이 손에 닿아 물컹물컹하고 축축하고, 기묘한 초능력으로 떠 있는 개구리의 모습이 귀여웠다.
"굉장하네."
레이겐의 감탄어린 말에 시게오가 안심 한 듯 배시시 웃었다. 순수하고 티 한점 묻지 않은 단정한 미소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레이겐의 이름은 여전히 레이겐 아라타카였다. 하긴 법적으로 진짜 결혼을 한 건 아니니까 성이 바뀔 일은 없었다. 자꾸 어린 아이가 자길 보고 부인, 부인 이라고 부르는게 거북해서 카게야마 집안 어르신에게 따지러 갔더니, 하늘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싫어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호칭을 꼭 정해서 불러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도 저는 남자인데 부인이 뭐예요. 그렇게 말하니 친척도 할 말이 없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스승님이라는 호칭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조언 해 주었다. 대신 스승님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시게오에가 꾸준히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해서, 레이겐은 팔자에도 없는 세살배기 아이에게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가르쳐주고 있다. 영어 예제문을 공부하는 레이겐의 옆에서 공부놀이를 하듯 삐뚤삐뚤하게 가족 이름을 적은 시게오는 이제 레이겐을 형이라는 호칭 대신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카게야마 저택의 생활도 별 변함이 없다.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저택에는 반쇼 부인과 레이겐, 그리고 어린 시게오 세명이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도 똑같았다. 주말이 되면 카게야마 부부가 와서 시게오와 레이겐이 잘 지내는지 친절하게 물어보고 가끔은 바깥의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더니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좋은 점은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 딱 하나 뿐이다. 저택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레이겐은 팔락거리며 부채질을 하다가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박고서는 앓는 소리를 냈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저택에 몇 없는 선풍기를 레이겐 방에 가져다 준 반쇼 부인이 미안한 듯 눈썹을 모았다. 그녀는 레이겐을 위해 수박이라던가 옥수수같은 간식거리를 자주 마련 해줬지만 솔직히 도시에서 살다 온 학생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 보다는 아이스크림이 훨씬 더 먹고 싶었다.
"모브, 네 초능력으로 아이스크림 같은건 못 만들어 아니면 얼음이라도."
레이겐의 옆에 누워서 색실공을 가지고 놀던 시게오가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시게오도 늘 입던 하카마와 기모노 대신 얇은 천으로 만든 유카타를 입고서는 돌아다녔다. 풀린 오비를 다시 제대로 묶어주고서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아이가 좋다는 듯 레이겐의 무릎팍 위에 앉았다. 더우니까 좀 떨어져. 그 말에도 시게오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고서는 기어이 다리 사이에 앉아서 소년이 뭘 하는지 보겠다는듯 자리를 잡았다. 너무 더워서 안되겠다. 레이겐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봤다.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시게오를 데리고 부엌에서 집안일을 하는 반쇼 부인에게 가서 말했다.
"저 시내 상점가에 좀 다녀올게요. 부탁하실 일 있으세요"
"어머, 그럼 올 때 생선 좀 사다줄래"
레이겐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겐을 따라서 쫑쫑 따라온 시게오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그 말에 부인은 절대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시게오가 한번 더 힘을 꾹 줘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도 스승님 따라서 갈래요."
"모브는 집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