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료우마“직접 농사지은 거예요.”
손님은 그런 말과 함께 렌에게 야채를 건넸다. 오이, 가지, 토마토, 감자 등, 상자를 가득 채운 여름작물은 윤이 반질반질 돌고 제법 알이 굵어 정성껏 기른 태가 났다. 이 카페의 단골들은 하나같이 렌에게 별별 선물을 주기를 즐겼는데, 렌은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근처에는 가게에 선물 주는 풍습이라도 있나’
렌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자주 보는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기억해 뒀다가 불쑥 선물하는 그의 버릇 탓에, 단골들은 이 무뚝뚝한 주인장에게 무어라도 답례를 쥐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내일 카레에 넣어볼게요.”
“팔 정도 양은 안 될걸 그냥 집에서 먹어요.”
손님의 말에 렌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 카페는 비록 장소도, 커피 맛도 다르지만 르블랑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 하루에 오는 손님이라고는 많아도 손발가락으로 전부 헤아릴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한들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는다’라고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다소 마음에 상처가 남는 탓에, 렌은 애매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장식하려고요”
야채를 냉장고에 넣으려는 렌에게 그렇게 물은 것은 또 다른 손님이었다. 렌은 한 손에 가지, 다른 손에는 오이를 든 채 손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손님이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리며 부연했다.
“쇼료우마精靈馬 만들려는 줄 알았는데. 오봉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시기였던가. 사실은 어릴 때도 집에서 오봉 맞이를 한 적이 없었던 탓에, 축제와 봉오도리만이 렌이 기억하는 오봉 풍습의 전부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렌은 양손에 든 야채를 잠시 내려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도 좋겠네요.”
학창 시절부터 재주를 갈고닦은 보람이 있는지 없는지, 오이 말과 가지 소는 몹시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사실 나무 막대기 네 개를 꽂아 세운 게 전부니, 재주가 어떻다고 할 만한 과업도 아니기는 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칼로 말과 소를 조각해도 좋았겠지만, 렌은 심플한 모양새를 즐기기로 했다. 사실, 며칠 정도 장식해 놓고도 멀쩡하다면 요리해 먹어 버릴 심산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칼을 대면 댈수록 쉽게 상할 테니 말이다.
‘딱히 타고 올 조상도 없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상이 아니라 조상을 공양할 마음이 없는 것이었지만, 렌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할로윈 호박이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쇼료우마 역시도 그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마땅한 제단도 없는지라, 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쇼료우마를 냉장고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사온 것도 아니고 선물 받은 야채니만큼 장식한 후 바로 버리기는 아깝다는 이유였다. 이 여름에 야채를 바깥에 둔다면 금방 상해 버리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 렌은 손님이 준 감자를 삶아 버터와 젓갈을 얹어 먹었다. 포슬포슬한 햇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짭짤한 젓갈이 버터의 풍미와 어우러져 맥주가 술술 넘어가는 맛이었다.
“또 술이야 적당히 마시지 그래 너도 이제 슬슬 건강 생각할 나이라고.”
뜨거운 감자가 식기를 기다리며 앞발로 툭툭 건드리던 모르가나가 한소리를 했다. 렌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고작 맥주 한 캔 가지고 잔소리는.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모르가나의 뱃살과 잔소리는 점점 늘어만 가는 듯했다. 처음 만났던 시절의 날렵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한 입 줘”
“됐네요. 이 몸은 맥주가 영 별로야. 전에 먹은 그거, 그 술이 맛있었는데. 투명하고 향긋한 거.”
“그건 비싸.”
하여간 옛날부터 입맛만 고급이라니까. 렌은 툴툴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고개를 빠르게 저은 모르가나가 적당히 식은 감자를 갉작거리기 시작했다. 감자는 한 사람과 한 고양이가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다.
며칠이 순식간에 흘렀다. 냉장고 속 가지와 오이는 점차 수분을 잃어 탱탱했던 피부가 쪼글쪼글하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며칠 동안 쇼료우마를 시야에 담고서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던 렌은 그제야 아차 싶어졌다. 이래서야 먹지도 못하고 버리게 될 판국이었다.
‘내일은 진짜 먹어야지.’
렌은 그렇게 다짐하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저녁이 지나갔다.
밤이 왔다.
냉장고 속에서 폭삭 늙어 버린 가지가 당장이라도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릴 듯한 느릿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렌은 그 위에 누군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멀리 있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없는 가지 소는 이리저리 헤매고 비틀대며 걸었는데, 렌은 그 종착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자신이 만든 쇼료우마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자신에게 올 수밖에 없겠지. 렌은 불쌍한 늙은 소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 직접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소는 몹시 컸다. 소에 탄 사람을 보려면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쭉 빼야 할 듯싶었다. 그러나 렌이 그 사람을 보기도 전에, 인사가 먼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목소리였다. 성인보다는 소년에 조금 더 가까운 목소리처럼도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더라 이상할 정도로 향수가 느껴지고, 어쩐지 물에 푹 잠긴 것처럼 가슴께가 갑갑해지는 듯했다. 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름 하나를 기억해 냈다.
“아케치.”
“그래, 맞아.”
아케치가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이토록 잊기 어려운 인간이 없을 텐데. 렌은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그 안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왜 가지를 타고 와”
올 때는 오이 말을 타고 빠르게, 갈 때는 가지 소를 타고 공양물을 잔뜩 실은 채 천천히. 그것이 오봉의 규칙 아니었던가. 이렇게나 다 늙은 가지 소를 타고 느릿느릿 오다니. 그야말로 가지 학대였다. 아케치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빨리 왔으면 했어”
“……올 줄 몰랐어.”
“아니, 알았을걸.”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며 가지 소에게서 내렸다. 이제 보니 아케치의 다리 아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투명했다. 정말로 유령인 것처럼.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건 네 꿈이니까.”
하기야, 현실에서는 가지가 소가 되어 움직일 리는 없고, 죽은 사람이 찾아올 일도 없다. 그러니 꿈이라는 설명이 가장 사리에 맞을 터다.
“왜 가지를 탔는지도 네가 알겠지.”
“내 꿈이니까”
“그래.”
그 역시도 맞는 말처럼 들렸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전부 렌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테니,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 까닭은 렌만이 알 터다. 그러나 잠시 고민해 보아도 이유는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답을 기다릴 생각조차 없었는지, 아케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곁에 있었던 오이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럼 갈게.”
“벌써”
“당연하지. 오봉도 곧 끝나니까.”
“아케치가 가지를 타고 오니까 그런 거잖아.”
오이를 타고 왔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마음을 담아 투덜거리자 아케치는 바보 같은 소리라도 들은 듯이 피식 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가지를 탄 거야.”
오이 말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눈 깜빡할 새에 아케치가 사라지고, 렌의 곁에는 늙어 빠진 가지 소만 남아서 피로한 듯 주저앉았다.
정말 이상한 꿈이었지.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쇼료우마를 꺼내 들었다. 나무 다리를 해체한 소와 말은 가지 된장 구이와 오이 볶음이 되었다. 오이는 조금 썼고, 가지는 껍질이 질겨져서 먹기 힘들었다. 진작 먹을 걸 그랬다며 렌은 후회했다.
하기야, 그랬다면 아케치는 꿈에도 안 나와줬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