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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ios_d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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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리는 멈추는 법을 모른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병원에 갔을 때부터 빌리는 다가올 상실을 각오해야만 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다. 짐짓 유쾌한 목소리로 조심스러운 단어들을 골라내어 빌리를 달래고 설득했다. 빌리의 손을 감싼 채였다. 아버지의 손은 늘 크고 듬직해 보였다. 지금도 아버지의 손은 빌리의 손보다 컸지만 그 손에 더는 기댈 수는 안 된다고 빌리는 생각했다.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선 안 되었다.



    서로가 서로뿐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절망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불량배에게 하루의 수입을 모두 빼앗기고 굶어야 했던 적도, 그렇지 않아도 추웠던 날 비가 온몸을 적셨던 날도, 남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 중에 그나마 성한 부분을 골라내어 입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던 적도.
    그럴 때마다 포기가 아닌 희망을 이야기해준 것은 빌리의 아버지였다. 그랬던 아버지가 자신의 병을 마주하고는 빌리에게 혹 자신을 잃게 되더라도 빌리의 미래까지 포기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앞날은 나에게는 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왜 그런 얼굴을 해 묻고 싶었던 것이 많았지만 하나도 묻지 못했던 건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는 기특함 따위가 아니었다.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언어가, 낱말 하나조차도 튀어나올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묻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묻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두 사람은 최악의 상황을 비켜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점차 호전되고 있었고, 빌리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아버지의 입원비를 벌기 위해 뉴밀리온 이곳저곳을 기꺼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위험하고 피곤한 생활. 아카데미까지 불편하고 불안한 분위기였다면 빌리는 버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입학하기 몇 년 전에는 상당히 험악한 곳이었다는 아카데미는 불량스러운 선배들의 졸업과 몇 번의 사건, 선생님들의 교체 등으로 완벽히 평온하지는 않지만 제법 나아진 분위기로 변했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아직 갱생되지 못한 일부의 문제아들은 아카데미 최고의 미남인 페이스 빔스에게로 관심을 몰아주고 있는 상황이니 빌리는 가끔 그와 비교적 자주 붙어있다는 이유로 시비가 걸리기는 했으나 그와 동일한 이유로 육체적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그의 형과 비교당하기는 하지만 페이스는 모든 여성의 비호를 받고 있는, 아카데미 내 서열의 최상위 등급이었던 것이다.




    모종의 사정으로 그의 형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베스티는 타고난 얼굴과 집안의 부, 적당한 요령 등을 가지고 인생을 편하게 살아가는 편이었다. 페이스도 그를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고 빌리는 이따금 그의 여자 관계를 이용해 페이스에게도, 페이스의 추종자들에게도 돈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가 돈에 그닥 집착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자의 경우를 이용해 그의 휴식을 방해하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기나 했지.
    제법 날카로운 경고에도 빌리가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그에게 때로는 편리함을, 때로는 귀찮음을 선사한 것은 페이스의 성품에 대해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막지 않는 바람둥이에게 붙이기엔 제법 모순적인 수식어지만 페이스 빔스는, 꽤 착했다.
    돈에 집착이 없고 내면은 착한 페이스 빔스는, 표면적인 친구 관계라고 해도 그의 베스티인 빌리가 부탁한다면 한 번쯤은 아버지의 병원비를 지원해줄지도 몰랐다. 그래놓고도 빌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을 대가로 어마어마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좋은 패였다.



    그러나 빌리는 단 한 번도 페이스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 빠른 그가 알아차릴까 싶어 꼭꼭 숨기는 편에 가까웠다. 단 한 번이라도 페이스가 대가 없이 동정, 혹은 선의로 그에게 금전적 도움을 내민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하고 말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페이스가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동정하지 않더라도 빌리에게는 빚을 졌다는 기억이 선명히 남고 말 것이다. 서로의 편리함을 위해 시작한 관계였으니 그렇게 이용해도 페이스는 새삼스럽게 실망하거나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도움을 받았다가는 그 편리함에 취해버리고 말 것이었다. 이번 한 번만, 정말 절실한 상황이니까. 그런 것들은 스스로에게 되뇌는 핑계가 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한 번으로 끝나지 못할게 뻔했다. 비단 페이스가 아니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빌리는 어리고, 눈치가 빠르기에 타인의 감정을 이끌어오는 것에도 능숙했다. 그런 그에게 남의 동정을 사는 일은 꽤 쉬운 일일 것이다. 그의 사정은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라도 안타까워할 이야기였으니까.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을 대신해 그를 키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버지, 의사도 고개를 내젓는 희소병, 차도는 보이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생존을 위해서는 입원이 필수였다.



    어쩌면 빌리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손쉬운 선택지, 거기에다가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잘못된 것 없는 선택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와이즈가 선택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



    섣부른 동정을 구하는 대신 빌리가 선택한 것은 미래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뉴밀리온의 모두가 선망하는 히어로. 악과 싸우고 시민을 위기에서 구하는 사람들. 빌리는 히어로가 되기로 했다. 섣부른 욕망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그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여간한 직업의 연봉으로는 불가능했다. 죽을 수도 있고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손에 꼽히는 고연봉을 받는 히어로만이 빌리가 목표로 노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쩌면, 그가 히어로가 될 때쯤에는 아버지를 치료할 방법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바램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악화될 때마다, 병원비를 낼 날짜는 다가오는데 아직 돈이 들어오지 못한 순간마다, 빌리는 새삼스럽게 절망하고 실망했다. 어린 자신이 표정을 가리기 위해 고글을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자신을 작위적으로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숨이 막혔다. 희망이라는 것이 너무 가냘프기 짝이 없어서. 어쩌면 포기하고 싶다가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아서. 아버지의 당부와는 다르게 빌리는 아버지를 잃게 되면, 잘 살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히어로를 지망하는 것도 돈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버지가 있어 절실했으니 돈을 벌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치료할 수 없게 된다면 그는 목표를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



    상실을 각오해야만 한다고, 너는 내가 키워온 자식이니 혹여 내가 없더라도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빌리는 오히려 아버지의 바람과 반대로 굴었다. 아버지의 상실은 없을 거라고, 빌리는 목표한 대로 히어로가 되어서,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 히어로가 되어서, 아버지를 완쾌시키게 될 것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고 성냥불 같은 희망만 붙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건 괜찮았다. 아버지가 그때까지 버텨주기만 한다면.



    히어로가 되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을 거야.

    그러고나면 아버지 말고 다른 곳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전에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니 아버지 말고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자. 자신의 마술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대단하다고 외치는 꼬마에게도, 정보를 부탁하는 단골손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베스티에게도, 그리고 트라이아웃에 합격하게 된다면 만나게 될 동료에게도.



    사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고 거짓말에 서툰 빌리 와이즈는, 가족의 상실이 두려워 가능성이 적은 희망을 애써 붙들고 있는 빌리는,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고글을 벗어 연약한 자신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고글 안의 얼굴을 보인 순간 빌리의 목표는 흔들리게 될 거고, 그는 그 무엇도 얻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상실한 외톨이가 되고 말 테니까.



    입원 비용을 대기 위해 정보상 일을 하느라 뒤늦게 도착한 병원, 아버지는 긴급 처치를 받고 잠들어 있었다. 오히려 그랬기에 빌리는 잠시나마 고글을 벗을 수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온 병실 문 앞에서 빌리는 고글을 고쳐 썼다. 따끔한 눈에 바람이 들어오면 눈이 시릴 테니까. 여러모로 고글은 유용한 물건이었다.


    아버지가 깬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걱정할 게 뻔했고, 미래를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되었다. 빌리는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돌렸다.


    빨리 가야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눈이 부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탓인지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래도 빌리는 느리나마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멈추면 무너지게 될까 무서우니까.


    터벅, 터벅, 그믐달도 비춰주지를 않는 고독한 길을 빌리는 혼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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