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아이를 시원한 다다미가 깔린 방에 뉘인 뒤 오래된 목조저택에서 사용인으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여자는 레이겐을 방으로 안내 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다다미가 깔려있는 방에서는 낡고 오래된 풀냄새가 났다. 손님방이었지만 이제는 레이겐의 방이 된 그 곳에는 몇달 전에 싸서 부친 이삿짐 박스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방 측면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석과 나무로 만든 좌식 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것들은 방에 있는 것 보다는 거실에 있는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레이겐은 매고 온 더플백을 나무 탁자에 옆에 내려놓았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여자가 물었다. 학생이라고 해서, 공부할 곳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다 놨는데 마음에 드니 레이겐은 잠시 나무 탁자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예의바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레이겐은 여자의 따뜻한 시선에 이내 속이 약간 불편해짐을 느끼며 더플백에서 교과서와 참고서 따위를 꺼내서 정리정돈 했다. 책 몇권을 올려놓자 좌식 탁자는 제법 그럴싸한 책상이 되었다.
"죄송한데 전화 한통만 쓸 수 있을까요"
"그래, 이쪽으로 오렴."
부인은 레이겐을 큰 방으로 안내 해 주었다. 레이겐이 쓰게 될 손님방에서 큰 방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초여름의 밝게 그늘진 복도를 걸으며 소년은 주변을 작게 두리번거렸다. 참 오래된 저택이다. 그럼에도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인지 더럽거나 낡았다는 소감보다는 정갈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곳이다. 일본식으로 꾸며진 방들과 정원과는 다르게, 다이닝룸으로 사용되는 큰 방에는 서구적인 소파와 예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를 보면서, 레이겐은 내심 다이얼을 돌려서 걸어야 하는 구식 전화기가 아닌가 하는 상상을 버렸다. 여자가 빌려준 것은 그냥 평범한 가정집에서도 사용 가능한 무선 전화기였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자, 전화를 받은 것은 어머니였다. 엄마, 저 오늘 도착했어요. 그런데 여기 맞아요 그 말에 레이겐의 모친은 잠시 침묵하더니 약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뒤에 네 아버지와 같이 도착할거야. 자세한건 네 아버지에게 전해들으렴.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레이겐은 전화를 든 채 저택 바깥을 한참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레이겐은 방으로 돌아와 방석위에 풀썩 앉았다. 그는 아까 듣다 만 이어폰을 귀에 꼽고서는 교과서를 폈다. 해가 질 때 까지 그는 영어 문법을 노트에 베껴 적었고, 그것이 질릴 때면 수학 참고서를 펴서 방정식을 풀었다. 길게 그림자가 늘어질 때 쯤에야 레이겐은 이삿짐 박스에 스텐드를 포장해서 함께 부쳤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사짐 박스를 열고 안에 든 필요한 물품을 하나씩 정리하는데, 다다미 틈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아까 낮에 본 꼬마가 기모노를 입은 채 서서 레이겐을 구경하고 있었다. 레이겐은 의식적으로 작게 미소를 띄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녁 먹으러 오래요."
꼬마가 또박또박 순하게 말했다. 레이겐은 꼬마와 함께 낡고 오래된 저택 복도를 걸었다. 낮과 밤의 저택 분위기는 달랐다. 해가 지니 약간 으스스하고 산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 제 손 끝에 작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레이겐은 제 손을 잡는 아이의 작고 작은 손을 잡고서는 물었다. 이름이 뭐야 카게야마 시게오요. 몇살이야 그 말에 꼬마는 제 작은 손가락 세개를 펴 보였다. 세살이구나.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레이겐 아라타카. 형은 어른이예요 아니, 난 아직 고등학생이야. 고등학생이 뭐예요 어른보다는 작고 아기보다는 큰거. 그렇구나.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걷자, 대청마루에 작은 상을 펴 놓은 여자가 인심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불렀다. 얘들아 밥먹자.
"레이겐 군은 가리는 음식 있니"
"아뇨,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다행이네, 씩씩하구나. 내일은 우리집 영감이 학교에 데려다 줄거야."
"근처에 학교에 가는 버스 같은 거 있나요"
그 말에 밥을 푸던 여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여기서 자전거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돼.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고."
"괜찮으니까 걸어갈게요."
"아냐, 태워줄게. 걸어서 가면 힘들어."
"괜찮아요."
레이겐은 접시에 여자가 튀겨놓은 고로케를 옮겨 담으며 말했다. 고집스러운 표정에 부인은 더 말을 하지 않고서는 둥글게 담은 밥을 레이겐에게 내밀었다.
100명도 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저택에 있는 건 세 사람 밖에 없었다. 시게오가 서툴게 젓가락질을 하는걸 보던 레이겐은 시게오의 소맷자락을 접어서 걷어올려주었다. 안 되는데. 아이는 밥을 입에 넣고서는 오물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묻으면 그게 더 곤란하잖아."
두 사람을 보던 부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시게오의 밥시중을 도와주었다. 식사를 마친 레이겐에게 집안일은 자신이 하겠다며 돌려 보낸 사용인은 시게오의 걷어올린 소매를 도로 내려주며 말했다. 시게오 도련님, 그러면 안돼요. 오늘만 봐 드리는거예요. 그 말에 아이는 표정 없이 몇번 고개를 끄덕이다 말았다. 방으로 돌아온 레이겐은 더플백에서 다른 교복을 꺼내서 옷걸이에 잘 걸어두었다. 아까 공부하던 부분을 복습하고서는 이불을 펼치자,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낯선 이불에서 나는 냄새가 낯설었다. 그래도 오는 길이 고되서인지 소년은 금방 잠이 들었다.
레이겐이 다니게 될 학교는 여기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이 동네 자체가 나이든 인구가 많기도 했지만, 워낙 저택이 산자락에 처박혀 있어서 그랬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을 이딴 곳에 처박아두는 일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새벽 일찍 일어난 레이겐은 하품을 하며 다다미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서 씻은 뒤 머리를 털며 나오는데, 토리이를 넘어서 걸어오는 시게오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도 시게오는 제 몸에 꼭 맞는 기모노와 하카마를 입은 채였다. 좋은 아침. 시게오에게 인사를 하자, 시게오는 잠시 꿈뻑꿈뻑 레이겐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사당 안쪽으로 사라졌다.
레이겐은 교복을 입으면서도 사당 안쪽이 신경쓰여 힐끗 힐끗 그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애가 아침부터 저렇게 돌아다닌담. 교복을 입고 교과서를 챙긴 레이겐은 부엌 안 쪽에서 부지런하게 일을 하고 있는 사용인에게 인사를 했다. 저 다녀올게요. 그 말에 부인은 레이겐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집 영감이 오늘 태워준다고 했으니까, 레이겐 군은 편하게 차 타고 다녀오렴. 레이겐은 싫다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부인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이를 넘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목조건물 밖으로 나가자 대문 앞에는 작은 중형차 한대가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부인과 부부인 듯 가볍게 아침인사를 나누고서는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은 뒤 레이겐을 차에 태웠다. 차 운전을 하는 남자는 주름이 잡힌 얼굴로 호탕하게 웃고서는 짙은 사투리가 베긴 말투로 물었다. 네가 레이겐 군이구나. 시게오 도련님이 기대 많이 했었는데. 도련님은 뵈어 봤는감 레이겐은 그 말에 작게 고개를 기울이며 도로 되물었다.
"기대요"
"응, 기대했지. 언제 오냐고 도련님이 우리 부부에게도 몇번이나 물어봤거든."
"왜요"
그 말에 입을 벙긋거리던 영감이 눈을 접어웃고서는 호탕하게 웃은 뒤 차를 세웠다.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그럼 공부 잘 하고 있다가 보자, 데리러 와 줄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이겐을 내려준 뒤 떠났다.
아침에 일찍 출발했는데도 오는 길이 멀어서인지 등교길에는 학생이 제법 있었다. 레이겐은 제 교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다니게 될 학교의 하복과 다른 옷이지만 하복은 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여름방학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올 때 까지만 잠깐 다닐 학교다. 동복만 사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전에 도시에서 입고 다니던 교복을 입은 채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교복과 도시 아이 특유의 깨끗한 얼굴, 그리고 볕에 타지 않은 하얀 피부와 레이겐의 옅은 체모에 힐끗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을 무시한 채 교무실을 찾아갔다. 오래된 학교여서 그런지, 나무로 된 교무실 문은 손 때가 많이 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 안되는 선생님의 시선이 죄다 레이겐에게 쏠렸다. 그 중 한 선생님이 레이겐을 향해 손짓했다. 네가 레이겐 군이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주름을 접어 웃었다.
레이겐의 담임 선생님도 나이가 꽤 많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추어쓰고서는 레이겐의 성적표와 목표 대학을 듣고서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미안하구나, 레이겐 군. 도쿄에 있는 대학교에 원서를 쓰는 애들은 거의 없어서 아마 내가 도움 될 건 많이 없을 것 같아. 그 말에 레이겐은 괜찮다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레이겐의 담임 선생님은 책상에 있는 달력을 체크하면서 말했다. 2주 뒤에 방학인데 원한다면 자율 학습으로 빼 줄게. 아니면 계속 학교에 올래 레이겐은 잠시 부모님도 없고 낯선 꼬마와 부인이 있는 고저택을 생각하다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저 그냥 학교에 올게요. 혼자서 공부하면 아무래도 해이해 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레이겐 군은 정말 그 저택에서 학교를 다니는거니 선생님은 그렇게 물었다. 레이겐은 제 주머니에서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서 선생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지도를 펼쳐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아아, 정말 여기구나. 그 말에 레이겐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요 레이겐의 선생님은 잠시 웃더니 말했다.
이 부근의 유지로 살았던 가문이 있던 곳인데... 아마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 뿐일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렴. 좀 멀다는 것 빼고는 좋은 곳이니까. 이상한 걸 모시는 곳도 아니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수업종이 울리자 그녀는 출석부를 챙겨 일어섰다.
방학이 남은 2주동안 학교에 오기로 했지만, 대신 오늘 수업은 대신 받지 않기로 했다. 레이겐은 분산스럽게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대충 맨 채 터벅터벅 교문 밖으로 나오는데 매미가 미약하게 우는 소리가 났다. 초여름은 여름인 것이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어떡할지 잠시 고민하다 학교 근처 상점으로 향했다. 바람이 약간 후텁지근했다.
한때 사람이 많이 살았었던 마을의 상가는 인구고령화의 위기를 정면으로 겪은 듯 반 쯤 풍파되어있다. 오래된 서점에서 그나마 올해 출간된 문제집을 한 권 산 레이겐은 옆건물에 있는 낡은 찻집에 들어갔다. 유리는 닦은지 오래되서 약간 뿌옇고, 탁자는 약간 끈적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장이 메뉴판을 가져다 주다 말고 레이겐을 응시했다. 처음보는 학생이구만. 레이겐은 약간 머슥한 표정을 짓고서는 메뉴판에 있는 메론소다를 주문했다. 가게 안은 에어콘 대신 낡은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에 오고 싶어서 찻집으로 들어온건데, 이래봐야 별 소용은 없는 것 같다. 레이겐은 턱을 괸 채 주인이 내어주는 메론소다를 받았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탄산수 아래로 메론 시럽이 깔려있고, 위에는 아이스크림이 한쿱 올라간 메론소다에 빨대를 꼽고서는 한입 쪽 빨아당기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레이겐은 귓구멍에 이어폰을 깊숙하게 꼽은 채 아까 산 문제집을 대충 훑어넘겼다. 기출 유형 문제가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다가 문득 다 부질 없는 짓 처럼 느껴져서 테이블에 대충 엎드린 채 생각한다. 그냥 고집 피워서 누나랑 있을걸. 기숙사 가지 말라고 고집 피웠으면 누나는 좀 화를 내긴 했어도 제 편을 들어주긴 했을테다. 아니 누가 상식적으로 대입을 반년 남기고 전학을 오냐고. 레이겐은 툴툴거리며 메론소다의 투명한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내렸다. 차가웠다.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떠먹고 그것을 다 마시니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있었다. 레이겐은 지갑에서 용돈을 털어 그것을 계산한 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도라야끼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음으로 도라야끼를 하나 사서 입에 무는데, 문득 저택에 있던 쪼끄만 꼬마가 생각났다. 3살이 도라야끼 빵을 먹어도 되나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도라야끼 빵 두개를 더 샀다.
버스 안에서는 영어 단어를 외우려고 했는데 약간 졸아버리고 말았다. 버스를 타고 고저택으로 돌아오자, 낯선 돌담이 제 키만치 높게 있는 모습도 새로웠다. 레이겐은 졸음을 털어버리듯 눈을 비비고서는 커다란 나무 대문을 밀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이 집의 사용인으로 일하는 아저씨가 데리러 오기로 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그는 걸음을 빨리 해서 돌계단을 뛰어넘어 토리이를 넘은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마루를 닦던 부인이 레이겐을 보고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벌써 왔니"
아, 담임 선생님이 오늘은 그냥 가도 괜찮다고 해서요. 허락 받고 땡땡이를 친건데도 문득 부끄러워서 레이겐은 제 볼을 살짝 붉혔다. 죄송한데 그분에게 오늘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 좀 해 주세요. 부인은 알겠다고 말하며 닦던 걸레를 들고 큰 방 쪽으로 사라졌다. 나 진짜 뭐하냐. 레이겐은 부인이 닦다 만 나무 마루에 상반신을 벌렁 눕히고는 눈을 감았다.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려 목만 들어 돌아보자, 다다미 문 뒤에 숨어있던 작은 머리통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빠꼼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는 세살 배기 아이도 있다. 레이겐은 웃으면서 시게오에게 손짓했다.
"이리와."
아이는 순순히 하카마 바짓자락을 질질 끌고서는 레이겐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방에서 포장 해 온 도라야끼를 꺼내서 아이에게 쥐어주었다.
"이게 뭐예요"
"너 먹으라고 사왔어."
도라야끼 빵봉지를 까서 아이 손에 쥐여주자 처음 본다는 눈빛으로 시게오가 그것을 쥐었다. 달콤한 앙금과 부드러운 빵과 함께 덜 자란 이로 그것을 꼭꼭 씹는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레이겐은 웃으며 시게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듯 쓰다듬었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무릎 위에 앉아서 도라야끼 하나를 전부 다 오물오물 천천히 먹었다.
한참 먹는데 문간 밖에서 차 타이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신사 문 너머로 새벽에 자신을 태워다 준 영감이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님인가. 레이겐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시게오는 양금이 묻은 엄지를 빨다 말고는 레이겐의 품에 제 고개를 묻었다.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서 부산스러움이 느껴져서, 레이겐은 아이를 안고서는 가방을 들고는 슬그머니 제 방으로 피했다.
방으로 들어온 레이겐은 어제 풀다 만 문제집을 펼쳤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무릎팍에서 쫒겨난 뒤 그것을 옆 탁자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잘린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시게오의 눈동자가 레이겐의 손목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겐은 풀지 않은 이삿짐에 휴대용 게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지만 세살 아기에게 게임을 시켜도 되나... 그런 생각에 그냥 자신이 필기하던 노트를 한장 찢어 색연필과 함께 쥐어주었다.
"형은 뭐하는거예요"
"공부."
"공부가 뭐예요"
"배우는거."
"왜 해요"
"시험 봐야돼서. 넌 그걸로 그림이나 그려."
레이겐은 대충 대꾸하고서는 턱을 괴고서 수학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레이겐의 눈치를 보던 시게오는 종이에 색연필을 들었다. 채점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색연필이기 때문에 빨간색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참 좌식 탁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했다. 1시간 정도 문제를 풀던 레이겐이 하품을 하며 시게오를 돌아보았다. 종이를 크게 찢어준 것도 아닌데 쬐깐한 것이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뭘 그리고 있나, 레이겐은 고개를 들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한자인지 글자따위가 붉은 색연필을 따라 끄적끄적 쓰여져가고 있었다.
"뭐 그려"
"그리는거 아니예요."
레이겐은 작게 웃으며 시게오가 쓰는 한자를 봤다. 카게야마 시게오. 이름이구나. 하긴 그 나이가 되면 이름 한자도 겨우 외우는 법이다. 이걸 그냥 음독으로 읽으면 모브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런 말도 이해하기에는 시게오는 아직 너무 어렸다. 모브 그 말에 작게 고개를 기울인 시게오가 물었다. 그게 뭐예요
"네 별명."
그 말에 시게오의 창백한 뺨 위로 작게 홍조가 올라왔다. 모브.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시게오는 작게 그것을 읊조리다 웃었다. 아이가 웃자, 단정하게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이 분 것 처럼 살랑거리며 일렁였다. 레이겐은 제 손을 뻗어서 일렁거리는 아이의 새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자아를 가진 것 처럼 레이겐의 손바닥을 미약하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물어보는데 시게오는 마냥 졸린지 하품을 했다. 그 애는 눈을 비비더니 쥐고 있던 색연필을 놓고는 소년에게로 다가와 무릎 위에 앉았다. 제 작은 고개를 레이겐의 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묻은 아이가 중얼거렸다. 나 졸려요. 그 말을 한 시게오는 그대로 품에서 잠이 들었다. 일렁거리던 머리카락도 원래대로 가라앉아버렸다. 레이겐은 어쩔 수 없이 시게오를 안은 채 문학 공부를 해야 했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 때문에 문학 예제글을 읽는데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레이겐은 마츠오 바쇼가 지은 하이쿠를 읽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깨길 반복했다.